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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Oct 23. 2021

알고보면 섬뜩한 오징어 게임의 결말

나랑 내기 한 번 더 할래?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 열풍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케이팝의 세계적 인기는 음악이라는 보편적 요소가 있기에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몇몇 한류 드라마 또한 참신한 소재와 배우들의 열연으로 아시아 권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로 제작되고 소재 또한 지극히 한국적인 드라마가 할리우드조차도 공략하지 못했던 인도와 이슬람 권에서도 1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나는 이 드라마가 아마도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 등의 인간의 '보편적' 질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서 자기 자신의 문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답은 너무 뻔하고

철학의 답은 너무 애매하다 


삶에 관한 보편적 질문은 보통 종교와 철학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종교의 답은 너무 뻔하였고 철학의 답은 너무 애매했다. 반면에 오징어 게임은 너무 뻔하지도 애매하지도 않은 절묘한 선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니 '보편' 인류가 열광을 할 수밖에..


우리는 보편적인 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진리를 힐끗 보게 해주는 작품을 명작이라 칭송한다

그러한 명작들은 대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류의'보편적' 사랑을 받는다


보편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단어에는 선과 악, 사랑, 자유 등의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단어가 있다

오징어 게임에서 특히 선과 악의 모습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선과 악의 개념이 마치 빛과 어둠처럼 뚜렷이 대조를 이루며 이 땅 가운데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 세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과 악은 구분되어 있지 않다.

밝은 태양 빛 아래 푸른 초원에서 사자가 사슴을 사냥하는 모습은 선한 사슴과 악한 사자의 대립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대자연의 모습일 뿐이다 (다만 선과 악을 구분 지어 바라보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늘 악한 사자와 선한 사슴을 구분 지어 바라본다. 그러나 악한 사자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자가 있을 뿐이다. 오징어 게임의 인기는 이렇듯 선과 악의 문제를 보편적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초반에 선한 사람처럼 그려졌던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 상우는 후반부에 가면 누구보다 악했고 그런 그의 악함을 멸시했던 이정재 또한 자신의 생명 앞에선 여지없이 남을 속인다.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보살피는 직업인 목사와 의사는 더없이 비열하고 추잡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늘 나서지 못하고 남의 뒤를 따르기만 했던 삶에 회의를 느껴 막판에 1번을 선택한 남자는  유리판 건너기 게임에서 첫 번째로 죽는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혼란스럽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눈에 하나도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 아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비친다는 사실이다. 말로 설명은 어럽더라도 누구라도 직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런 것이 보편성일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는 이처럼  평소 익숙했던 개념들이 전혀 낯설고  생소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지금 현생 인류는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선과 악이 존재할까?


이쯤에서 우리는 선과 악을 비롯한 보편적 개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혹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 등의 개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은 아니었을까? 단지 인간의 편의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은 아닐까? 하는 질문 말이다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드라마를 들여다 본다면  오징어 게임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모두들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으로 456번 이정재를 꼽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오징어 게임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1번 오일남 할아버지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이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이 전 인류에게 보편적 관심을 끄는 이유가 드라마를 통해서 삶의 전체적 단면을 힐끗 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게임 속의 동화 속 세계와 같은 무대와 진행요원들의 핑크 빛 복장은 겉보기에는 화려한 현대 사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냉혹한 게임 운영 방식과 탈락자의 처리 방식은 현대 사회의 비인간적인 냉혹한 경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둘을 합쳐 본다면,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냉혹하고 무자비한 현대 사회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셈이다.


각 게임은 삶의 축소판이기에 삶의 모든 양상이 가감 없이 드러나 보인다. 모두들 각자의 목숨이 가장 소중하다. 자신의 목숨 앞에서는 그 누구도 양보가 없다. 설령 나중에 자신의 그러한 모습에 절먕하며 목을 매고 자살을 할지라도 말이다. 남을 위해 목숨을 스스로 내어놓는 유일한 인물은 탈북녀 강새벽에게 구슬을 양보한 지영인데 그녀가 양보한 이유도 결국 살아 나갈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자신을 위한 판단을 했을 뿐이다


삶의 축소판에 놓여있기는 비단 게임의 참가자들 뿐만 아니라 게임의 진행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철저하게 마스크 속에 자신을 숨긴 채 감시당하며 살아간다. 총을 멘 채 참가자들을 감시하지만 자신 스스로도 늘 중앙 모니터실로부터 감시당한다.  서로 철저히 순종하는 듯 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꾀를 부려 사상자들의 장기를 밀반출하기도 한다. 그들 간에는 서로 자유로운 소통이 허락되지 않는다. 소통하는 순간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조직세계의 부품들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가 인간이 일개 부품으로 몰락한 근대 사회의 부조리함을 드러낸 명작이었다면 오징어 게임은  그러한 부조리함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현대인들 또한 여전히 조직 세계의 부품으로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라는 실상을 여실하게 보여 준다


암튼 게임 속의 참가자와 감시자, 감시자를 또 감시하는 프런트맨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 낯익고 친숙하지만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괴기스러운 불안감을 시종일관 경험하게 된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의 일상은 늘 평범하고 낯익고 친숙하다. 그러나 삶의 심층에는 언제나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흐른다. 비록 사람마다 느끼는 강도는 다르겠지만 삶이 주는 무게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재미를 위해 창조된 세상


오징어 게임이 삶을 닮아있다면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는 삶의 설계자와 닮아있지 않을까? 충분히 생각해 볼 수있는 비유다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는 1번 오영남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오징어 게임을 만든 이유를 밝힌다. 재미를 위해서이다. 극 중에 몇몇 명언이 나오는데 나는 그중에 하나가 바로 오영남 할아버지의 마지막 대사라고 생각한다


"자네 돈이 아주 많은 사람과 돈이 한 푼도 없는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나?  바로 재미가 없다는 거야 재미가.."


돈이 너무 많아 아무리 돈을 써도 줄지 않을 정도면 그때부터는 돈 쓰는 것이 힘든 노동이 된다.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 남아도는 돈으로 조금의 재미라도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는 것이다. 재미를 위해 오징어 게임을 설계했다는 오일남의 이야기는 묘한 설득력을 가진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비유이지만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가 하나님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기쁨과 오일남의 재미는 성격이 다를지언정 설계자가 자신을 위해지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성경 속의 전능한 신인 하나님은 인간들이 서로를 믿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기쁨을 누리기 위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하는 반면


오징어 게임의 전능자인 오일남은 경마장의 말들이 달리는 모습에 베팅을 하며 재미를 느끼듯 원초적 쾌락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오징어 게임을 기획했다고 말한다


그깟 재미를 위해 사람의 목숨을 건 그토록 끔찍한 일을  벌였냐고 오일남의 멱살을 잡고 쌍문동 성기훈은 분노한다. 그때 오일남 할아버지의 대사 또한 명언이다.


"나는 한 번도 게임을 강요한 적이 없어. 모두가 자신들이 원해서 한 것일 뿐이야"


슬프게도 오일남의 이 말은 순도 100%의 사실이다. 실제로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 직후 참가자들이 패닉에 빠져 게임 중단 투표를 했을 때에도 마지막에 캐스팅보드를 쥔 오일남은 게임 중단에 투표함으로써 다음번 게임부터  참가자들이 온전하게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오일남은 인생을 게임으로 보았다. 게임은 재미를 위한 것이다.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게임에서의 선은 공정성이다. 그래서 오일남은 무엇보다 게임의 공정성, 즉 선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이는 장기밀매를 위해 참가자에게 게임 정보를 흘린 진행요원을 사살한 프런트맨의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체를 가지고 장기밀매를 하든, 뭘 하든 상관없지만 너희들은 여기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치인 '평등한 기회'라는 규칙을 어겼다"


자신의 돈을 가지고 자신의 재미를 위해 오징어 게임을 설계한 오일남이 과연 악한 사람일까? 그 누구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단지 스스로의 결정으로 단번에 빛을 청산하고 인생을 역전시킬 기회를 제공한 오일남이 과연 나쁜 놈일까?


오일남은 병상에 누워 죽는 순간까지 재미를 위해 이정재와 내기를 한다. 자정 전까지 밖에 얼어 죽어가는 노숙자를 구하는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오일남의 마지막 게임은 길가의 노숙자가 아니라 성기훈의 인간성을 두고 한 게임이라고 누군가는 해석한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게임을 한다는 오징어 게임에 분노를 느꼈던 성기훈이라면 이 상황에서 당장 자기가 뛰쳐나가 길가의 노숙자를 구하는 게 당연했을 것이고, 오일남도 "저 노숙자 곧 얼어 죽을 텐데 자네라면 어쩌겠나?" 하고 넌지시 물어 봄으로 성기훈의 인간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과 오일남을 질타하던 성기훈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유리창 너머로 오일남과 함께 사람 목숨을 건 게임을 지켜보며 오일남과 동일하게 게임의 관찰자의 자리에 서고 만다

결국 "아직도 사람을 믿나?"는 말로 애당초 사람은 신뢰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베팅을 한 오일남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다. 신기한 것은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플라시보 효과는 사람의 믿음이 실질적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는 좋은 예이다


삶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냉혹하거나 사랑이 넘치지도 않는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마치 자연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햇빛과 바람과 비를 내리듯이 말이다. 다만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인간의 생각이 있을 뿐이다.


자연 속의 모든 존재는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현상을 동일하게 겪는다. 그런데 오로지 인간만이 생로병사를 '괴로워'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가 괴로운 것은 우리가 그것을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우리의 생각대로 되어간다. 섬뜩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성경 속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전해 준 가장 큰 기쁜 소식(복음)또한


 '네 믿음대로(생각대로) 될지어다'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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