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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Apr 23. 2022

사랑의 테크닉, 이렇게나 야한 책을??

에릭 프롬이 이 제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30여 년 전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과제 중의 하나가 책을 읽고 

리뷰를 써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읽으라고 정해 준 책이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이었습니다


사랑의 기술? 처음엔 책 제목만 보고 

"역시 대학은 다르구나 나를 성인 취급해주는구나

이렇게나 야한 책을.. " 하며 흥분하며 읽었다가

곧바로 차분해진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랑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개념과 너무 흡사합니다

에릭 프롬은 신학자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고 

오히려 무신론자에 가까운 사회심리학자이자 인문주의 철학자인데


그런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사랑의 개념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의 개념과 

너무 닮아있다는 것이 

목사인 저에겐 참 흥미로왔습니다


프롬은 현시대를 

'존재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어떤 존재인가를 따지기보다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더 중요시하는

자본주의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인의 즐거움이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쇼윈도를 바라보거나 

일시불이든 할부로든 

살 수 있는 만큼의 물건을 사는 일이고 


두 사람의 연인은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한 뒤에 

자신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품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때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관계가 상품의 교환처럼 되어버린 이유는 

현 사회가 물질적 성공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슬픈 사실은 이런 경향이 프롬이 살던 시대보다 

지금이 훨씬 더 심해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한편 현대인은 그 무엇보다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 또는 조직과 

동일한 가치관을 따르지 않을 때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소속된 사회 집단의 가치관에 

동조하게 되면 안정감을 느낍니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파시즘이나 나치즘에 

찬동한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그저 군중 속 무리가 느끼는 

획일적인 동일함만을 의미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남들이 대학을 가니 나도 대학을 가고

남들이 명품백을 드니 나도 명품백을 들어야 하고


남들이 sns를 하니 나도 sns를 하고

남들 사는 아파트에 나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남들과 같아져야만 평안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다름에서 오는 고독과 소외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독과 소외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를 없애기 위해

무리 속에 들어가 남들과 동일해졌지만


무리 속에서 또 다른 남을 발견하게 되거나 혹은

다른 무리 속의 남에게 불안감과 적대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찌 보면 불안과 두려움은 

나와 남을 계속해서 구분 짓는 현대인에게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태생적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떨쳐버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종교나 국가를 통해서 

타인과 일체감을 얻는 방법입니다


내가 믿는 신을 다른 사람도 믿을 때 혹은

같은 국가에 속해 있을 때 

다른 사람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는 필연적으로 

섬기는 대상과 섬기는 사람 사이에 

또는 지배와 피지배자 간의 주종관계를 형성합니다


물론 이러한 주종 관계는 

소속감을 통한 일체감을 주기에

어느 정도 불안의 감정을 해소시켜 줄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런 관계를 유지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를 희생하거나 억제해야 합니다


압도적인 지배를 당하거나 

어떤 대상을 전적으로 숭배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사실.. 병적인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병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일체감을 얻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숙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프롬은 그의 책 '사랑의 기술'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인간 안에 있는 능동적인 힘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힘이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힘이다...

사랑으로써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면서도 

계속해서 두 사람으로 존재하는 역설이 일어난다...'


사실 프롬이 말하고 있는 사랑은 

현대인의 관념 안에는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랑과 같습니다


프롬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인은 

사랑이 주는 것이라고 말하면 

자신의 손실부터 생각합니다

주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종교인들 조차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는 일이 고통스럽게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상급이 주어지는 

미덕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는 것을 손실이라고 생각하는 한 

진정한 사랑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풍족한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풍족하면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풍족한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풍족한 사람이란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주어도 

그 능력이나 기술을 사용해서 

또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낌없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란  

반드시 특별한 기술을 갖춘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은 물론 

기쁨, 흥미, 지식을 주는 사람 역시 

풍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풍족한 사람이며 

풍족한 사람만이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이해관계가 얽힌 

'거래 상대' 와의 관계에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정말로 상대를 자신과 같이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할 때만 생겨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앎을 필요로 합니다 

아니.. 상대에 대한 앎을 갈망합니다


이러한 앎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인 이해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온몸과 마음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준에 이르러야 비로소 상대방에 대한 '앎'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 상대방을 사랑하는 일은 곧 


자신을 비롯한 인간 존재 자체를 

체감하는 경험의 근거가 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행위란 

특정한 누군가에게 관심을 쏟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 전체, 세계 전체에 관여하는 

태도를 취하는 일입니다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세계 전체의 생명을 사랑하는 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이처럼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동정, 그리고 동일화가 생겨나고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고독과 불안이 소멸하는 것입니다


결국

프롬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사랑의 기술은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황금률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이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란 말이며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어 놓으란 소리입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으며 

우리 모두는 '인류 공동체'라는 커다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

즉  한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가족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 깊이 깨닫는 사람만이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찬 이 땅 가운데 

진정한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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