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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Oct 28. 2020

재혼한 목사의 첫 설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막 설교를 마쳤다. 첫 설교였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아내와 사별한 일, 코흘리개 아이들 둘을 데리고 미국 땅을 밟은 일, 늦은 나이에 토플 준비하여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일, 학교 기숙사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던 시절.. 졸업 후 미국 교단에서 어렵게 목사 안수받은 일, 거기에 재혼까지..


그리고 여태껏 평신도로 출석하던 교회의 3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지금 막 첫 설교를 마친 것이다.


설교의 주제는 ‘거룩한 삶’이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삶 앞에 굴복하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아 나가자는 내용이었다.
온갖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거룩함을 지켜나갔던 성경 속의 인물들처럼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 나가자는 내용이었다.

내용이 진지해서인지.. 아니면 그동안 늘 지켜보았던 사람이 하는 첫 설교여서인지 몰라도 모두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강단을 주목하고 있었다.

지금 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6년 전 처음으로 미국 땅에 도착해서 아이들과 함께 출석한 교회였고 지금까지 나와 아이들이 생활하며 자라나는 모습들을 지켜봐 왔던 사람들이었다.

홀아비가 아이들 데리고 쩔쩔매던 모습들.. 어려운 상황 가운데 학업을 마치고 아름다운 여인도 만나 다시 가정을 꾸린 일..

그런 사람이 이제 어였한 목사로서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설교를 끝낼 수가 없었다. 침묵이 감도는 청중을 향해 준비한 원고 외에 마음속의 말을 덧붙어 이어나갔다.

“사실 여기까지가 제가 본문을 주해하며 준비한 설교 내용입니다. 그런데 지금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 막내아들의 얼굴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가정은  재혼 가정입니다. 이제 결혼 한지 1년이 갓 넘었습니다. 결혼 당시 저에게는 12학년 아들과 8학년 딸이 있었고 아내에게는 4학년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옛 어른 말씀에 그릇된 말씀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옛 말씀 중에서 제가 가슴을 치며 동의하는 짧고 굵은 진리의 말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미운 7살 혹은 죽이고 싶은 7살’이라는 말입니다. 결혼할 때 우리 막내의 나이가 그즈음이었습니다.”

청중들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더욱 집중을 하였다. 저 사람 저기서 저런 말하면 안되는데..라는 표정들이 역력하였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아내와 데이트 시절, 저는 주말에는 시간을 낼 수 없었고, 아내는 직장이 있어서 주중에 시간을 낼 수  없어서 둘이 함께 할 시간을 갖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어쩌다 여건이 되어 둘이 만나더라도 아내는 아이 때문에 늘 조급해했기에 느긋이 대화를 나누며 데이트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간혹 둘이 함께 쉬는 휴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날은 아이들에게도 휴일입니다. 저의 아이들은 이미 커서 상관이 없었지만 막내는 아직 초등학생이어서 집에 혼자 있을 수 없기에 아내가 늘 데리고 나옵니다...  환장합니다.”

 청중들은 동의하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때면 저는 주로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놀게 해 줄 수 있는 곳을 만날 장소로 택합니다. ‘반즈 앤 노블’ 같은 서점은 스타벅스 매장도 함께 입주해 있어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아내와 데이트하기에 적격인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이를 놀게 해 놓고 자리에 와서 이런저런 깊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면 5분도 안돼서 아이가 조르르 달려옵니다. 그리고는 나와 아내 사이에 들어와 내게 등을 보이며 엄마에게 무엇인가를 조릅니다. 도저히 대화를 이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면 투명인간 쳐다보듯 한 번 보고는 다시 엄마하고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정말 미운 아이였습니다. 다행히 아이에 대한 속마음을 들키지 않고(?)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가정은 꾸렸는데 이제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싫은 것은 싫은 겁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고 감정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씀하는데 형제는커녕 저는 자녀가 된 아이마저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뜨겁게 사랑하기는 둘째로 치더라도 말도 붙이기 싫은 겁니다. 제 말을 무시하니까요.. 그런데도 매일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은 나의 몫이라 너무 불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아내의 노트북 컴퓨터 사진 파일을 정리하다가 막내 아이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막내가 어렸을 때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 속에의 막내는 아직 작은 아기였고 그 아기를 너무나 사랑스럽게 안고 있는 아내의 모습들이 담긴 사진들이었습니다.

‘나한테는 참 밉고, 불편한 아이가 아내에게는 이토록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와의 불편한 관계에만 몰두하던 나에게 새삼 ‘아이와 엄마’의 관계가 보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막내는 이혼한 아내의 힘들었던 시기에 아내를 버틸 수 있도록 한 버팀목이었던 것입니다. 하루 종일 혼자 엄마만을 기다리며 지냈을 아이가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그러면서도 한없이 미안한.. 그러한 존재였을 겁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아내는 아마도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다 그러하듯이요.

다시금 저는 막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고 나와 불편한 사이인 막내.. 그런데 제가 막내를 미워하는 것은 철저히 나를 기준으로 생각한 결과였습니다.

관점을 조금 달리해서 이 아이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즉 나의 아내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리만큼 사랑하는 존재로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내 의지를 동원해서 애써 막내를 한 번 사랑해보자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되는데 실천은 영 어려웠습니다. 뭔가 어색합니다. 의지는 있는데 감정이 아직 따라오지 않으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몇 달간 마음속으로 이 아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사랑하는 아이… 이렇게 자신을 세뇌시키듯 지냈습니다. 비록 눈에 띄게 행동으로나 말로써 잘 해준건 없지만 늘 그러한 마음을 가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런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막내를 학교에서 픽엎해서 집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옆자리에서 쫑알대던 막내가 갑자기 저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 아빠 나 좋아해?”

그래서 저는 시큰둥하게 쿨한 척 대답했습니다. “ 응 좋아하지..”

그러자 막내가 제 말을 받아 “나도 아빠 좋아해” 하면서 운전하고 있는 저에게 몸을 기대며 제 팔을 안는 것이었습니다.

별 것 아닌 말… 별 것 아닌 행동인데… 정말 아무 일도 아닌데..
순간 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그 순간 아이가 사랑스러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날 이후 막내는 저에게 스킨십을 자주 합니다. 징그러울 정도로 자주 합니다. 엄마도 놀라워합니다. 이제는 감히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식이니까요

사랑하는 데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태어나는 데는 우리의 의지나 결단이 전혀 필요 없지만
태어난, 거듭난 우리가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미운 7살의 아이나, 혹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도 뜨겁게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로써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사랑하고자 힘써 애쓸 때 우리는 놀라운 일이 경험하게 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저 위에서 “ 자 어디 한번 서로 사랑해 보거라” 하시며 팔짱 끼고 지켜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써서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힘을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려고 힘써 애쓸 때
우리는 어느덧 마음으로 뜨겁게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너희는 거룩해질 수 없다.. 너희는 할 수 없다는 거짓된 속삭임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 힘을 다하여 형제를 사랑하고, 또한 거룩함에 이르도록 힘써 애쓰시기 바랍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축도를 하고 설교를 마칠 수 있었다. 어느덧 나의 눈가에.. 청중들의 눈가에 촉촉이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나는 사랑에는 의지가 따른다는 말이 하고픈 거였다. 사랑하며 살고는 싶은데 영 마음이 안 따른다며.. 그런 사랑은 위선이 아니겠냐며 포기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거룩한 삶을 살고는 싶지만 여건이 허락되질 않아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이런 핑계 뒤로 숨으려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 먼저 손을 내밀어 보니까 마음도 따라 오더라.. 내가 해보니까 정말 그렇더라”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의지다.
어쩌면 노력의 결과라고까지 말할 수 도 있을 것도 같다.

이제 나는 재혼 4년 차에 접어든다. 결혼 초반에 공들인 조금의 노력들이 이제는 어느덧 결실을 맺어 참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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