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는 말을 좋아한다. '새는 날아가며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책에서 나온 말로, 우리는 간발의 차로 테러를 피했고, 우연히 사고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러하다. 아침운동을 갈 때면 늘 지나야 하는 횡단보도에 걸린 '사망자 발생지역, 사고주의' 문구, 학창 시절 등교하다 본 붉은 웅덩이와 그 옆에 떨어져 있던 헬멧. 길을 걷다 넘어져 사망한 누군가의 이야기와 뉴스보도로 본 이웃마을의 칼부림 사건.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어쩌면 당연한 이 이치를 깨달은 후에는 삶이 꽤 재밌었다. 우연히 얻어걸린, 덤으로 부여받은 삶이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는 누군가의 선의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좋아한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선의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을 사랑한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아파트에 들어서며 보인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 마침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며 기다린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순간. 그 안에 아무도 없음을,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의 귀갓길이 조금은 더 편안하길 바랐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그 순간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우연히 살아남았다, 는 이치에 묻혀 어느 순간 잊었던 이 마음을,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재난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소타와 스즈메가 한 소녀의 떨어지는 귤을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 건, 소녀가 도움이 필요한 듯한 이에게 기꺼이 오토바이를 태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아남았던 건, 빗속에서 정처 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소녀를 지나치지 못한 한 아주머니의 자상함 덕분이고, 끝까지 저들의 세상을 지키려 한 한 소녀와 청년의 의지 덕분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선의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정함이 이어지고, 상냥함이 불어나 그 마음들로 지탱되는 세상이라니,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해당 영화에도 나오듯 누군가를 구하는 정말 중요한 일은 대개 비밀에 부쳐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무 좋은 사람들이 상처 입고 죽어가기도 한다. 정작 구원받은 우리는 알아채지 조차도 못하게.'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다이진이 그러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 지독한 외로움과 추위 속에서 기억해 주는 이 없이 자리를 지켜야 했던, 온기를 바랐던 아이. 누군가의 가족이 되고 싶었던 다이진이 끝내 다시 스즈메를, 그리고 세상을 구하는 길을 택했을 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우리는 사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정당화하며 사는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생을 이어가는 건 아닐까.
문득 얼마 전 우연히 봤던 군인들의 추모영상이 생각났다. 지금으로서는 이름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3.1 운동에 나선 어린 학생들이 떠올랐다. 예전에 판례에서 본, 어린아이들을 구하려다 죽은 한 청년이 떠올랐다.
떠나간 사람은 기억해줘야 하고, 머무는 사람은 바라봐줘야 하니까.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 자서현-
정말 좋아하는 말이다. 나는 떠나간 이를 기억하고 싶다. 머무는 이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봐주고 있으니까 떠나간 이들을 상기하고 싶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덜 쓸쓸하게 떠나갈 수 있도록. 그들의 의협심이 헛된 일이 되지 않도록. 한낮 서민인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그저 이렇게 계속해서 기억하고 이야기하려 한다.
좋은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으면 좋겠다. 선한 사람들이 기억되었음 좋겠다.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장면이 있다. 그들이 문을 닫을 때면 늘 떠올려야 했던 대지의 기억, 그 속에 깃든 감정.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 되게 일상적인 모습들이다. 등교하며 깔깔대는 학생들,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며 힘차게 집을 나서는 아이, 지친 모습으로 우동을 먹는 아가씨와 관람차에서 일어서려는 아이를 말리는 아버지.
그들이 지키려고 한 건 사실 거창한 정의도, 신념도 아니다. 피곤하고 따분하기도 한 그저 그런 일상. 그 일상을 지키려 한 것이다.
한 때는 저버리려 했던 사소한 하루하루를, 그 속에 깃든 행복함, 즐거움, 지루함마저도 누군가는 온몸으로 지켜내고 있었구나.
모두가 한 번쯤은 웃을 수 있는 하루를,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 따뜻한 마음이 돌고 돌아 이내 세상을 데울 수 있길, 그리하여 그 마음을 나눈 이들이 저들의 다정함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