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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난 Mar 24. 2023

당신께

'스즈메의 문단속' 감상평

 해당 글은 다수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는 말을 좋아한다. '새는 날아가며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책에서 나온 말로, 우리는 간발의 차로 테러를 피했고, 우연히 사고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러하다. 아침운동을 갈 때면 늘 지나야 하는 횡단보도에 걸린 '사망자 발생지역, 사고주의' 문구, 학창 시절 등교하다 본 붉은 웅덩이와 그 옆에 떨어져 있던 헬멧. 길을 걷다 넘어져 사망한 누군가의 이야기와 뉴스보도로 본 이웃마을의 칼부림 사건.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어쩌면 당연한 이 이치를 깨달은 후에는 삶이 꽤 재밌었다. 우연히 얻어걸린, 덤으로 부여받은 삶이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는 누군가의 선의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좋아한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선의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을 사랑한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아파트에 들어서며 보인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 마침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며 기다린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순간. 그 안에 아무도 없음을,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의 귀갓길이 조금은 더 편안하길 바랐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그 순간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우연히 살아남았다, 는 이치에 묻혀 어느 순간 잊었던 이 마음을,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재난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소타와 스즈메가 한 소녀의 떨어지는 귤을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 건, 소녀가 도움이 필요한 듯한 이에게 기꺼이 오토바이를 태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아남았던 건, 빗속에서 정처 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소녀를 지나치지 못한 한 아주머니의 자상함 덕분이고, 끝까지 저들의 세상을 지키려 한 한 소녀와 청년의 의지 덕분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선의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정함이 이어지고, 상냥함이 불어나 그 마음들로 지탱되는 세상이라니,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해당 영화에도 나오듯 누군가를 구하는 정말 중요한 일은 대개 비밀에 부쳐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무 좋은 사람들이 상처 입고 죽어가기도 한다. 정작 구원받은 우리는 알아채지 조차도 못하게.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다이진이 그러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 지독한 외로움과 추위 속에서 기억해 주는 이 없이 자리를 지켜야 했던, 온기를 바랐던 아이. 누군가의 가족이 되고 싶었던 다이진이 끝내 다시 스즈메를, 그리고 세상을 구하는 길을 택했을 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우리는 사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정당화하며 사는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생을 이어가는 건 아닐까.


 문득 얼마 전 우연히 봤던 군인들의 추모영상이 생각났다. 지금으로서는 이름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3.1 운동에 나선 어린 학생들이 떠올랐다. 예전에 판례에서 본, 어린아이들을 구하려다 죽은 한 청년이 떠올랐다.


 떠나간 사람은 기억해줘야 하고, 머무는 사람은 바라봐줘야 하니까.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 자서현-


 정말 좋아하는 말이다. 나는 떠나간 이를 기억하고 싶다. 머무는 이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봐주고 있으니까 떠나간 이들을 상기하고 싶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덜 쓸쓸하게 떠나갈 수 있도록. 그들의 의협심이 헛된 일이 되지 않도록. 한낮 서민인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그저 이렇게 계속해서 기억하고 이야기하려 한다.


 좋은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으면 좋겠다. 선한 사람들이 기억되었음 좋겠다.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장면이 있다. 그들이 문을 닫을 때면 늘 떠올려야 했던 대지의 기억, 그 속에 깃든 감정.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 되게 일상적인 모습들이다. 등교하며 깔깔대는 학생들,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며 힘차게 집을 나서는 아이, 지친 모습으로 우동을 먹는 아가씨와 관람차에서 일어서려는 아이를 말리는 아버지.


 그들이 지키려고 한 건 사실 거창한 정의도, 신념도 아니다. 피곤하고 따분하기도 한 그저 그런 일상. 그 일상을 지키려 한 것이다.


 한 때는 저버리려 했던 사소한 하루하루를, 그 속에 깃든 행복함, 즐거움, 지루함마저도 누군가는 온몸으로 지켜내고 있었구나.


 모두가 한 번쯤은 웃을 수 있는 하루를,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 따뜻한 마음이 돌고 돌아 이내 세상을 데울 수 있길, 그리하여 그 마음을 나눈 이들이 저들의 다정함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길.


 이 글을 본 당신의 하루가 잠깐이라도 따뜻해졌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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