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놀라운 밤

첫 친구와 인종차별

by 하난

얼마 전 브리즈번 스퀘어 도서관에서 열리는 English Conversation Group에 다시 참여했다. 늘 길을 잃어 헤맸던 터라 일찍 출발한 나는 다행히도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 근처 의자에서 차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1시 25분, 곧 시작한다는 방송이 나오고 나서 느지막이 일어나 대기 중인 직원에게 국적을 말하자 배정받은 조는 10조.


거의 문이 열리자마자 온 것이었음에도 조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맑은 눈을 가진 선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일본인이라고 했다. 호주에 온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그녀는 아직 영어에 서툰 듯했다. 나도 그리 영어에 뛰어나진 못해 어찌저찌 대화를 이어가고 있으니 곧 한 사람이 더 왔다. 알록달록한 옷과 팔찌가 시선을 끄는 분이셨는데 마찬가지로 일본인이라고 했다.


해당 모임은 국적이 섞이지 않도록만 주의해서 무작위로 섞는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이미 있었던 일본인-가나라고 명명하겠다-과 새로 오신 분- 오시라고 명명하겠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라고 했다. SNS로 알게 된 사이로 실제로는 처음 만난다고 했는데 굉장히 놀라운 인연이었다.


2023년 6월에 촬영한 브리즈번 스퀘어 도서관 일정표


셋이서 어색하게 서로의 호구조사를 하고 있으니 모임방의 문이 닫히고 직원이 지금부터 모임을 시작하겠다는 안내를 했다. 다른 조는 적어도 4명~5명은 되었던 지라 3명, 그것도 아시아인밖에 없는 작금의 사태에 다소 당황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들 다소 내향적인 성향인 데다 지난번과는 달리 주제문도 없어서 곤란하던 차였다. 다행히도 문이 닫혔다고 인원을 안 받는 것은 아니었는지 이후에 사람 두 명이 더 왔다. 한국인과 태국인이었는데 일본인들끼리 나란히, 한국인들끼리 나란히 앉아 있어 꼭 국가 간의 협상자리 같기도 했다.


새로 온 한국인은 굉장히 외향적인 분으로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어딜 여행해 봤는지,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요즘 유행하는 영화는 어떤 것인지, 지금 생활에 만족하는지 등을 물었는데 한 명, 한 명 차분히 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곧 MC로 데뷔해도 괜찮을 듯했다. 그분-소희라고 명명하겠다-은 호주에 온 지 2달 차로 아직 일을 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도 아직 일을 구하지 못했던 터라 위로 아닌 위로가 되기도 하면서 문득 슬퍼지기도 했다. 이렇게 성격 좋고 영어에도 능하신 분이 일을 구하지 못했다니. 아무래도 코로나가 풀리며 워홀 오기 쉬운 호주로 오신 분들이 너무 많은 탓인 듯했다. 그녀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기도 하고, 브리즈번의 색다른 곳은 다 가 봐 이제는 흥미롭지 않았던 탓에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내달 초까지 일이 안 구해지면 돌아갈 것이라고 하기도 했고.


늘 호주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들만을 만나왔던지라 반가웠다. 사실 워홀이라는 게 여행과는 사뭇 다른 것인지라 그리 많지 않은 돈으로 한국에 비해 물가가 비싼 나라에서 준비한 적은 돈으로 정착한 후에는 벌어야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본인의 선호와는 관계없이 일이 안 구해지면 돌아가야 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꼭 호주에 남아있지 않아도 됨에도 이왕 왔으니까 많이 경험해 보고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에 돈이 떨어지면 점점 초조해질 수밖에 없고 그런데도 일이 구해지지 않으면 낙심할 수밖에 없다. 지치기도 하고. 더군다나 그녀의 말대로 브리즈번은 생각보다 작은 도시로, 몇몇 군데 외에는 딱히 놀려갈 만한 곳이 없다. 집 앞만 나서도 광활한 하늘, 맑은 공기와 높이 솟은 나무,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를 경험할 수 있긴 하지만 그게 다인 것이다.


안 그래도 해당 고민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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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sih Conversation Group은 워홀러가 주된 참여층이다 보니 대부분 20대였는데 놀랍게도 태국에서 오신 분은 38세. 한국 나이로 치면 40세인 분이셨다. 여행비자로 왔는데 생활이 흡족해서 여행비자가 만료될 무렵 다른 비자로 연장할 생각이라고 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이제야 술을 먹어도 괜찮은 나이, 호주의 연령제한이 있는 일자리들에서는 이제서야 일할 수 있는 나이인 나는 워홀러 중에서도 꽤 어린 편에 속했다. 이제껏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연상이었다는 점에서 그 점은 더더욱 명확했다. 어리다 보니 경험도 적고, 경력이 없는 데다 동양인 중에서도 동안에 속하는 편이었던 지라 무언가를 구하거나 하기가 어렵기도 했다. 그런데 '어리다'는 건 동시에 꽤 많은 친절과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기도 했다. 당장 이 모임에서 만난 소희 님의 경우도 한참 어린 동생을 대하듯 힘들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도와주겠다며 번호를 주시기도 했다. 때문에 너무 일찍 온 것은 아닐까, 이후에 조금 더 삶을 경험하고 오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과 함께 지금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했다.


반면, 나이가 차 중년이 되어서 이곳에 오는 것은 어떨까. 확실히 20대 초반의 청년들에 비해서는 경험과 노하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만큼 많은 도움을 받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20대의 모임으로 가득한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더 고된 과정이 되지는 않았을까.


나이에 연연하는 한국인의 습성 탓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일자리 구하기도 어렵지만 여기에 와서 다행이라며, 더 머물고 싶다며 말갛게 웃던 그분이 멋있고 존경스러웠던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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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흘러 모임을 파할 때가 되었다. 모임을 종료한다는 직원의 말을 끝으로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좋았지만 특히나 가나 와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에 슬쩍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도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 이제 무얼 할 것이냐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려는데 같이 보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아직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던 우리는 그저 정처 없이 걸으며 대화했다. 그녀가 영어 말하기에 어려움을 많이 겪는 듯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안다. 영어 하기 어려우면 일본어로 해도 괜찮다."라고 하니, 깜짝 놀라며 일본어로 말해 왔다. 그 말을 하면서도 일본어를 안 들은 지 오래된 탓에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일상적인 대화였던 지라 못 알아듣는 부분은 없었다.


덕분에 한 명은 일본어로, 한 명은 영어로 말하는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긴 했지만 무척 즐거웠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취업 전에 경험을 쌓고자 이곳에 왔는데 호기롭게 온 것과는 달리 막상 도착하고 보니 너무 외롭다고 했다. 홈스테이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아무래도 남이다 보니 불편하다며 웃었다. 남자친구가 일본에 있는데 진지하게 결혼까지 생각 중이라고 했다. 20대 중반에 불과한 나이였기에 놀랐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결혼을 일찍 하는 편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맞는 것 같았다.


가나는 한국에 관심이 많은 친구로, K-pop, K-drama를 정말 좋아한다고 했다. 몇몇 한국 아이돌의 콘서트를 보러 갔으며 당장 작년에 서울로 여행을 갔다고 한다. 그녀의 친구 중 한 명은 한국에서 남자친구를 사귀어 작년에 결혼하여 한국으로 이민했다고도 했다. 만나는 일본인마다 한국 드라마, 아이돌을 좋아하니 내가 기여한 것은 단 한 치도 없으면서 괜히 으쓱했다. 이런 게 흔히 말하는 국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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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이 되어 우리는 헤어졌다. 가나가 홈스테이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기에 저녁은 먹지 않고 헤어졌는데 시간도 많고, 아쉽기도 했던 터라 그녀의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줬다. 그리고 그 길에서 외국에 놀러 간 사람들이 종종 겪곤 한다는 당혹스러운 일을 겪게 되었다.


겨울인지라 해가 일찍 져 5시임에도 어둑어둑한 날이었다. 길을 찾기 위해 나는 손에 휴대폰을 쥐고, 가나는 휴대폰에 긴 끈을 달아 옆으로 매고 있었다. 대화하느라 서로의 얼굴을 보며 걸어가고 있는데 순간 낯선 손이 나타나 가나의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까만 얼굴의 여자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아쉽다는 듯 웃었는데 친구들로 보이는 무리가 함께 웃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까맣게 반들거리는 눈동자가 어찌나 소름 돋던지. 가장 무서운 점은, 그 웃음이 너무도 해맑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나가 아는 사람들인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는 걸음걸이가 이상한 남자가 있었다. 이상한 기분에 빙 둘러 걸으며 힐끗 그를 바라보니 세상에.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인적이 없는 거리도 아니었다. 도심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주택가였고 버스 정류장도 곳곳에 있어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곳이었다. 반짝이는 파란 불빛이 예쁜 거리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서운 마음에 곧장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멀게만 느껴지던 인종차별이라는 말이 어느새 곁에 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