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의 물결

그를 닮은 그녀

by 하난

여느 날과 같이 브리즈번 스퀘어 도서관에서 열리는 영어회화 모임에 참여했다. 한중일, 타이 사람으로 구성된 조에서 이루어진 이번 모임은 사실 무얼 했는지 기억이 안 남는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과하게 많아 옆 사람 말이 잘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Pardon?"으로 가득 찬 1시간. 아쉬움을 안고 도서관을 나서는데 마침 오늘 모임에 참여한 가나가 보였다. 이전에 만났을 적과 같은 옷을 입고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 달려가니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가나와 마찬가지인 일본인으로, 얼마 전 다른 일본인들 간의 모임에서 만났다고 한다. 마침 모두 시간이 있었기에 우리는 함께 사우스 뱅크 근처를 거닐었다.


처음 본 그녀-유키라고 하겠다-는 취미가 많은 사람으로 노래 감상도, 오디오 청취도, 운동도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육상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곧은 자세와 단단한 몸이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섰음을 증명했다. 가나가 아직 영어에 서툴러 유키는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말했는데 두 언어 간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져서 놀랍고 신기했다. 영어를 할 때는 미국의 고등학생 같던 말투가 일본어를 하는 순간 애니메이션의 성우처럼 바뀌었다. 가나가 가장 연상이어서인지 무척 공손하게 말했는데 친근한 류의 일본어만 듣던 내게 그건 꽤나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유키는 대학교 4학년 생으로 작년에 휴학을 해 필리핀에 3개월간 어학연수를 다녀왔다고 한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필리핀으로의 어학연수, 호주로의 워킹홀리데이를 왔다고 하는 그녀는 무척 단단한 사람이었다. 뚜렷한 목표와 이루고 말겠다는 근성, 당연히 이룰 수 있으리라는 자기 확신은 그녀를 더욱 빛나게 했다.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와 눈이 마주칠 때면 싱긋이 떠오르는 미소. 고민을 털어놓는 가나에게 전하는 조곤조곤한 진심.


고작 3시간 만에 나는 그녀에게 매료되고야 말았다. 특별한 말이 아니다. 깊은 눈동자와 미묘하게 떠오르는 표정, 곧은 자세와 상대를 배려한 걸음걸이, 주변을 살피는 섬세함과 한 마디, 한 마디에 녹아든 다정함과 자신감. 그건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득, 호주에 오기 전 주마다 참여한 독서모임이 떠올랐다.

퇴근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서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그곳에서 멋있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았다. 그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다소 특이한 사람이었다.


독서모임에서 진행을 담당했던 그는 늘 자신을 '현모양처'라고 소개했다. 이 모임에서 우리 조의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빛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지였다. 뮤지컬 배우마냥 우렁찬 목소와 슬픈 이야기에는 한없이 진지해지고,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아이마냥 퍼지는 웃음이,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사소한 말에도 격할 만큼 호응하고 나서서 즐겁게 해 주려는 것이 보이는 사람이었다. 첫인상은 진행에 뛰어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 그 정도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그를 다시 만났다. 어쩌다 보니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는 시간이 왔고, 누군가가 그에게 그의 밝은 모습이 부럽다고 했던 것 같다. 그에 그는 묵혀뒀던 과거를 내보였다. 혹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어린 시절. 그로 인해 오고야 만 불안장애와 공황. 겨우겨우 쌓아왔던 삶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던 순간들. 일기를 쓰고, 나서서 인사를 하고, 스스로를 보듬고 괜찮다고 중얼거렸던 나날. 아직도 그런 순간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평소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멋있으면, 누군가를 존경하는 마음이 날 압도할 때면, 눈물이 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살짝씩 떨리던 눈동자, 여느 날과는 달리 아래를 향하던 시선, 조용한 몸짓에서 그의 고통을 느꼈다. 그의 절망을, 희망을, 부던한 노력의 순간들과 여기 있는, 그날의 자신을 닮은 사람들이 저를 통해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길 바라는 진심을 봤다.


어떠한 눈짓은 언어를 압도한다. 그건 꼭 광활한 자연을 눈에 담을 때와 같아서, 그 무엇으로도 전할 수가 없다. 그저 마음 한 구석에서 소용돌이치며 뜨겁게 자리할 뿐이다.


세상을 배운다는 게, 사람을 만난다는 게 그런 것 같다. 상상도 못 한 괴짜와 미친놈이 많다는 것을 깨달으며 동시에 그보다 더 영화 같은 사람들이 많음을 깨우쳐 가는 것. 그들이 전하는 감동에 힘입어 그들과 같은 류의 온도를 지닌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 나가는 것.


그들이 전해준 따스함으로 오늘도 다시 한번, 내디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