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저편에

by 하난

도서관 모임에서 알게 된 폴라를 개인적으로 만났다. 폴라는 며칠 전에 18살이 된 어린 친구로, 콜롬비아에서 왔다고 한다. 20대, 많으면 40대가 있는 모임에서 10대를 만난 것은 처음인지라 신기하기도 하고 타국에서의 생활이 내게도 쉽지 않은데 아직 미성년자인 그녀에게는 얼마나 고될까 대단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보자고 한 것이 컸다.


오늘은 그녀의 어머니까지 3명이서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어머님과 함께 호주에 왔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당연히 둘이서 볼 줄 알았던 터라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왔다며 소개해줄 때는 퍽 당황했더랬다. 장유유서의 나라 한국에서 평생을 거주했다 보니 어른이 어려운 것도 있었다. 그래도 아직 미성년자인 어린 딸이 한 번 본 웬 외국인을 만난다고 하면 걱정되는 것이 당연한지라 흔쾌히 그들과 함께 했다.


두 사람은 꼭 닮은 친구 같았다. 서로를 마주 보며 개구지게 웃는 모습이 그러했고, 영어에 서툴다 보니 번갈아가며 "이게 맞아?"라고 묻는 모습이 그러했다. 취미가 무어냐고 물으니 앞다투어 인터넷에 검색한 사진을 보여주며 이 드라마, 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며 맑게 웃는 것도 꼭 그러했다. 내가 빠르게 말할 때면 한껏 몸을 빼고 집중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을 얘기하며 눈을 빛내는 것도 마치 18살 소녀들 같았다.


폴라는 성우가 꿈인 아이였는데 호주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이리로 왔다고 한다. 콜롬비아 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쳐주지 않아 6개월 전부터 영어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그녀를 지원해 주고자 함께 왔다고 한다. 콜롬비아를 벗어나 살게 되리라는 생각은 평생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며 웃는 그녀는 오로지 딸을 위해 여기에 왔다고 했다. 마흔이 넘어 처음 영어를 접해봤고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어 이렇듯 딸과 함께 모임을 다니고, 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띄엄띄엄 서툴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울렁였다. 처음으로 온 외국이라고 했다. 40년 평생 처음으로 모국을 떠나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딸만을 위해 가족, 친구, 스스로 쌓아온 모든 것을 두고 내딛는 걸음은 얼마나 숭고한가. 능숙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다시 말해 줄 수 있겠냐고 묻는 용기는, 어린 딸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자 감내했을 두려움과 설움은 얼마나 서글프게 빛나는가.


폴라가 화장실에 간 사이 그녀에게 꼭 전하고 팠던 마음을 전했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낯선 곳에 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가늠이 가지 않아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저희 어머니가 떠올라요. 그녀도 종종 늙어서 무언가 배우는 것은 더 힘들다는 말을 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그 힘든 걸 해내시고 있잖아요. 딸을 위해서, 오직 딸만을 위해서 그걸 해내시고 있어요. 저는 당신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내내 웃고 있던 그녀의 눈이 떨렸다. 붉게 물든 눈가에는 이윽고 눈물이 맺혀 뺨을 적셨다. 숨을 가다듬으며 눈물을 거두는 그녀는 호주에서의 생활이 어떻냐는 물음에 "아름답다"라고 답했다. 딸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발음한 "Wonderful"이라는 단어는 시든 나뭇가지마냥 가련하고도 단단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메었다.


계속해서 눈물을 거두지 못하면서 그녀는 콜롬비아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을 경험했다고, 풍경도, 사람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이곳에 와서, 날 만나서 참 감사하다고 했다.


돌아가고 싶어 항공편을 알아보다가도 문득 창밖을 바라보게 되는 건, 한 달간 마주한 무수한 인연들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이 모이는 이곳은 그만큼 다채로운 다정함이 존재한다.


길을 가다 눈이 마주칠 때면 미소 짓는 사람들, 대중교통 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을 때면 먼저 와서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사람들, 강아지에게 인사해도 되냐는 말에 강아지의 공마저 손에 쥐어주는 사람, 길을 묻자 행복한 여행 하라고 기원해 주는 사람과 일을 찾고 있다는 한 마디에 저가 아는 일자리 정보란 정보는 전부 적어주는 사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서툴게 휘젓는 손모양과 눈빛만으로도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걸, 누군가의 행복을 간절히 바랄 수 있다는 걸.


사람은 결국 사람에 의해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여기서 배웠다.


문득 얼마 전 방문한 골드코스트의 해변이 떠올랐다. 발을 감싸는 부드러운 모래와 푸르게 빛나다 해가 지며 분홍빛을 머금던 해변. 촉촉한 모래가 빛을 반사해 꼭 하늘과 같이 물들던,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듯한 광경.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들었던 바다의 웅성임을. 꼭 이 나라에 머무는 사람들만 같던 그 상냥한 빛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