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가 사랑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Casamuseo(집박물관)
파블로 네루다, 칠레의 인물 중 유일하게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집을 읽은 적도, 사진을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칠레 생활도 조금은 익숙해졌겠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 일단 그의 생가를 박물관처럼 꾸며놓은 Casamuseo(주택박물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파블로 네루다 박물관 : 파블로 네루다 생가 박물관은 총 세 곳이다. 각 집에 애칭이 있을 정도로 시인의 감성이 우러나는 그 집들은,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시내 한복판(La chascona), 인천 월미도(La sebastiana), 그리고 강화도(Isla Negra) 정도에 하나씩 있다고 보면 된다(접근성도 얼추 비슷하다). 하루에 다 가기에는 어렵고, 나는 사흘 동안 하루에 하나씩 방문했다. 눈치챘겠지만 La chascona는 (산티아고에 사는 내게) 정말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반면, Isla Negra는 돌아오는 버스를 잡기도 너무나 힘들 정도로 접근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Isla Negra와 La sebastiana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만큼 외부의 풍파로부터(?) 안전하기에 집터 자체도 널찍하고 파블로 네루다가 아끼는 소장품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La chascona는 파블로 네루다의 사망 당시 사회주의와 반사회주의 시위대의 각축장이 되어 파괴된 물건들도 많다고 들었다.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시인이었지만 그의 집과 수집품을 보건대 파블로 네루다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굉장히 부유한 삶을 살았고, 소유욕을 굳이 극복하고자 하진 않은 것 같다. 칠레의 역사 속에서 추방과 배척 등 온갖 풍파를 겪는 삶을 살면서도 뱃머리 장식에서부터 동양에서부터 건너온 물건까지, 희귀템(?)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않았던 파블로 네루다의 집을 둘러보자니 수집에 대한 그의 남다른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블랙앤화이트, 미니멀한 장식의 인테리어가 선호되는 요즘의 입맛에는 맞지 않겠지만, 온갖 잡다한 수집품들이 그 자리가 자기 자리이기라도 한 듯 어울려 앉아 집 자체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오디오가이드를 통해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실없는 농담하기를 즐겼던 괴짜 수집광의 에피소드들을 들으며 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가 된 것 마냥 그의 집을 거닐면 칠레판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차피 칠레 산티아고엔 딱히 볼만한 게 없으니, 파블로 네루다의 집에 다녀온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당시의 일기(발췌 내용은 아래에)를 읽으니 더더욱 별 볼일 없는 칠레에서 할 수 있는 일 하나를 이루고 돌아온 것 같아 뿌듯하기만 하다.
파블로 네루다 생가 투어 (2014년 8월 8일-10일)
(1) 라 차스코나 (La Chascona)
산티아고 센트로에 있는 파블로 네루다의 생가 중 한 곳을 방문하다! 마침 시간이 맞은 에도와 같이 근처에서 밥을 먹고 라 차스코나로 향했다. 파블로 네루다가 그의 정부를 몰래 숨겨놓고 만나고 나중엔 부인과 이혼하고 정부와 살림을 차린 곳.. 아티스트의 삶과 사랑이란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후에 피노체트의 칠레 군부독재와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한 파블로 네루다의 장례식 행렬은 처음으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칠레시민들의 반정부시위가 되었고, 동시에 사회주의자인 그를 반대하는 무리는 라 차스코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생가 중에서도 가장 남아있는게 적고 볼 것이 없다고 했는데도 이미 너무 훌륭한 박물관이었다. 실내 사진은 찍을 수 없었지만 정말 대단한 수집광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의 콜렉션은 어차피 직접 보는게 가장 감동이 클 것 같기에.. :) 칠레로 오세요~
(2)라 세바스티아나(La Sebastiana)
발파라이소에 다시 한 번 가다!! 파블로 네루다의 두 번째 집에 가기 위해 발파라이소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발파라이소 언덕 전경과 태평양이 잘 보이는 곳을 원했던 파블로 네루다를 위해 친구가 찾아 준 집, 그래서 언덕 꽤 높은 곳에 위치했는데 나는 시간도 많고 체력도 많아서 걸어 올라갔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고 40분 정도 뒷산 올라간다는 기분으로 올라가니 La Sebastiana를 만날 수 있었다.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 건물은 5층으로 되어있으며 정말 아무 것도 시야를 가로막지 않는 조망권의 위너였다. 넓진 않지만 있을 건 다 있는(침실, 욕실, 바, 다이닝룸, 서재, 거실 등) 아기자기한 공간들에 수집광인 파블로 네루다가 전 세계에서 모은 콜렉션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었다.
라 세바스티아나를 구경한 후 언덕을 따라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언덕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이만 연을 날릴 뿐이었지만 가장 높은 곳에서 발파라이소 전경을 바라보며 맞는 바닷바람이라니, 라 세바스티아나에 살았던 파블로 네루다가 부럽지 않았다.
(3)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파블로 네루다의 생가 중 산티아고에서 가장 멀고 가기 번거로운 이슬라 네그라로, 혼자 용감하게 나섰다. 아무래도 외진 곳이고 처음 가는 곳이라 조금 떨렸지만 터미널에서 만난 공군 아가씨가 친절하게 도와줘서 표를 잘 끊고 버스에서 한잠 자고 나니 내리라고 했다. (터미널이 아니라 정류장 같은 곳이라서 안 내리면 끝까지 갈 뻔 했는데 동양인 여자애가 이슬라 네그라 가냐고 물어본 걸 기억해주신 기사아저씨가 깨워주셨다.) 산티아고는 날씨가 좋아서 이슬라 네그라도 좋을 줄 알았는데, 두시간 거리 밖에 되지 않는데도 짙은 해무에다가 바닷바람까지 거세서 딴 세상처럼 추웠다. 소매치기 안 당하려고 입은 두꺼운 잠바에게 고마웠다.
오후 느지막히 도착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아서 삼십분 가량 기다려야 했다. 혼자 영어로 주의사항을 듣고 들여보내줘서 남들보다 5분 정도 일찍 들어가 구경할 수 있었다. 개별로 듣는 오디오 가이드이지만 다같이 시작하면 하나하나 차례로 설명하기 때문에 다들 한 번에 우루루 이동하는 바람에 이전엔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었는데, 이번엔 쾌적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파블로 네루다의 생가 중 가장 수집품 보존이 잘 되어 있고 뭐가 많다고 들었는데 추운데 사람도 많아 기다리느라 진이 빠져서 그런지 다른 두 개의 집보다 특별히 인상적인 점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넓고 뱃머리로 가득찬 방, 각종 탈로 가득찬 방, 말 인형으로 가득찬 방과 태평양으로 가득찬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으면 밝은 곳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빛을 발했을텐데 열장 가까운 사진이 모두 거무죽죽하게 나와서 아쉬운 것 빼곤 이슬라 네그리 투어도 정말 즐거웠다!
+집에 돌아오는 길, 터미널도 아닌 동네 정류장같은 곳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를 향해 적극적으로 손을 흔들어야 했는데 40분 간격으로 오는 대형버스를 두 대나 놓쳐버리고 이러다 산티아고 못 가는 거 아닌지 심각하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그 다음 버스를 향해서는 적극적인 구애의 동작을 했더니 겨우겨우 잡아탈 수 있었고 '일단 산티아고만 갈 수 있다면 얼마를 내든 상관없어 어헝헝ㅠ'하며 탔는데 마이너 회사 소형버스라서 차표도 더 싸다.
관람 안내 : 세 집 다 파블로 네루다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스페인어/영어(포르투갈어도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제공되는 오디오가이드를 대여할 수 있다. 가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닥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었던 것 같고 관광객이 많이 방문해서 그런지 체계적이고 깔끔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신기했던 것은 실외에서 유리를 통해 건물내부 전시장을 촬영하는 건 금지되어 있는데 실내에서 바깥쪽 풍경 등을 촬영할 수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