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칠레

생각보다는 차가웠던 칠레의 첫인상

by 행귤
남미는 나에겐 항상 꿈의 대륙이었고 그들의 열정과 문화가 나에겐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굳이 남들이 신기해하는 칠레라는 나라로 교환학생을 왔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을 알기엔 너무 추운 7월에 도착해버렸고, 칠레는 남미 중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남미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남미스럽다는 것 자체가 내가 품고 있던 고정관념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지만 웃는 얼굴로 귀청이 터져라 '세상은 하나고 우리는 친구다! 아미고!'라는 스피릿을 피워 올릴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칠레엔 없었다.
스페인어라도 배워 가겠지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품기엔 칠레 스페인어는 사투리가 심하고 표준적인 스페인어와는 다른 단어가 많으며 아예 다른 형태의 동사 변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칠레에서 배운 스페인어를 쓰면 다른 남미 나라 또는 스페인에서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칠레에서 쓰는 칠레어를 따로 정리한 책이 있을 정도이니 스페인어 배우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하기도 어렵다.

-2014년 7월 21일 일기에서


오늘은 칠레에 와서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낀 날이었다. 그래서 더 행복하다.
어제까진 이 나라에 대해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7개월을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보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 들진 않았지만, 앞으로 칠 개월 동안 진짜 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교환학생에 대해 회의가 느껴졌었다.
도착하자마자 맞이한 우중충한 시내, 낙서와 덤불로 가득한 관광지, 관심을 보이기는커녕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숨기지 않는, 칠레의 날씨처럼 차가운 칠레 사람들, 못 알아듣겠는 빠른 스페인어, 늘 가방과 신변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치안 수준으로 인해 이 나라를 좋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지금까지는 그냥 너무 나 자신만 바라보고 나만 생각하면서 주위를 경계해서 더욱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시내에만 나가도 내 가방만 끌어안고 나를 쳐다보는 모든 이들이 강도와 소매치기로 보이곤 했는데, 그래서 밖에만 나갔다 오면 긴장했던 게 풀리면서 등과 턱이 뻐근하곤 했는데 이젠 여유가 생기니 스페인어도 더 잘 들리고 지나가는 아저씨한테 길도 물어보고 버스 뭐 타야 되는지도 물어보고 했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살다 보니 살 만 하구나,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기분이 너무너무 좋아졌다.
사실 칠레 사람들은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머물게 해 준 미겔네 온 집안 식구들, 그리고 칠레에 온 첫날 길을 잃었는데 30분 동안 돌아다니면서 온갖 가게에 다 물어본 후 집을 찾아준 라파엘이라는 할아버지(할아버지가 더 길치인 것 같았긴 하지만) 등 좋은 사람이 더 많았는데도 처음에 적응이 안 되다 보니 나쁜 면만 바라봤던 듯하다. 나 편하니까 이제 주위가 보이고 이 곳도 사람이 살고 울고 웃는 이들이 지내는 곳, 그리고 남미에서는 가장 안전하고 정돈된 곳이라는 것이 느껴진다니 정말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며칠간 너무 추웠는데 오늘 햇빛이 따스해서 더욱 감사했다. 역시 여행자의 겉옷을 벗기는 것은 햇빛 하나면 충분하다. 오랜만에 칠레에 온 한국인 교환학생들과 불고기를 해 먹으면서 주인 할머니와 아저씨 몫도 챙겨드리니까 엄청 칭찬받았던 것, 아침에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께서 눈이 잘 안 보이니 버스가 오면 알려달라는 말로 시작한 소소한 대화(비록 북한의 소행에 대한 할머니의 분노가 대부분이었지만)와 나를 잊지 않고 영화 보고 밥 먹자고 연락 온 미겔(신세 지는 동안에는 뭘 하든 미안했는데 이젠 나도 집이 있어서 당당히 만날 수 있다.) 등등이 나를 행복하게 해줬다. 지난 주는 많이 외롭기도 하고 적응하는 게 힘들었는데 이번 주는 즐거웠다..
앞으로 매일매일 기분 좋은 일만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칠레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했다.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다.

- 2014년 7월 25일 일기에서

칠레의 대형 국기와 그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남자

칠레에서의 생활을 시작할 시기, 나의 일기에는 두근두근한 신혼의 느낌이 가득하다. 이젠 7개월 동안 정이 뚝 떨어지다가도 뜻밖에 호감이 가기도 하는 칠레의 참모습을 겪게 되겠지. 그리고 그것마저도 미운 정이 들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 아니나 다를까 칠레를 떠나올 즈음에 나는 누군가 칠레에 대해 물으면 핏대를 세우며 물가부터가 비호감인 나라라고 욕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칠레를 욕할 땐 "칠레가 뭐가 어때서?"라며 욱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칠레는 브라질에 이어 남미대륙에서 물가가 두 번째로 비싼 나라면서도 그다지 관광지라 할 곳도 많지는 않다. 자연이 빚어낸 관광지가 아니라면, 광장이나 성당 등이 예쁘지도 않은데다가 낙서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여행자 입장에서는 김 빠지기 쉬운 곳이다. 칠레를 여행할 때에는, 사람들이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을 굳이 감추지 않는 눈초리로 쳐다볼 것이고, 말을 걸기 전까지는 굳이 당신에게 호의적이진 않을 것이다. 바가지를 씌우거나 속이려 들 것이고, 지갑이나 휴대폰을 털어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며 조언해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칠레 사람들은 원래 무례하니까 신경 쓰지 말라며 대신 사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칠레는 그런 곳이다. 나에게 칠레는, 미워할 이유가 너무 많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그런 곳이었다.


+사실 이런 칠레의 부정적인 모습은 대부분 수도 산티아고 사람들의 모습이다. 북부지방이나 남부지방에서는 훨씬 더 호의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해 칠레 사람들은 북부건 남부건 보편적으로 차갑고 개인주의적이라는 첫인상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