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산티아고 시내를 보기 위해 달려갔던 그곳
비가 와서 약속도 취소되고 방 안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또 뒹굴대다가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갑자기 너무 이쁘게 맑아져서 기분전환 겸 산크리스토발 언덕으로 무작정 향했다. 매번 아센소르를 타고 올라갔었는데 오늘은 걸어가야겠다 싶어서 올라가는데 45분 걸린다던 구글의 그 녀석은 어떻게 올라갔기에 45분이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난 1시간 45분 걸려 올라갔다.
도로로 되어있어서 힘들진 않았고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도 많았다. 동양인 여자 혼자 올라가니 위험할 수도 있고 실제로 정상 근처에서 지친 여행객을 상대로 금품을 갈취하거나 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긴장하면서 올라갔다. 특히나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정상에 다다를 즈음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있긴 하지만 어두운 길을 내려갈 생각에 조금은 무서웠는데 다행히 마지막 아센소르가 2분을 남기고 하강 준비를 하고 있어서 잡아탔다. 칠레 전통음료인 Mote con Huesillo를 마셔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늦어 모두 문을 닫아서 아쉽게 못 마셨다.
- 2014년 9월 6일 일기에서
안데스 산자락에 위치한 이 동네에서라면, 만년설에서부터 불어오는 좋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을 거란 나의 순진한 기대를 무너뜨리기라도 하듯, 산티아고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대기오염의 도시였다. 물론 대부분의 개도국처럼 선진국으로부터 수입하여 무분별하게 배기가스를 배출하며 다니는 중고차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건조한 기후와 더운 날씨,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그 안데스 산맥이 이루어내는 분지 지형 때문이다. 완벽한 분지 형태의 산티아고에서는 대기의 이동이 없기 때문에 바람도 거의 불지 않고, 시내에서 배출되는 온갖 매연과 건조한 도시의 먼지가 차곡차곡 쌓여, 눈에 그 스모그 대기층이 보일 정도이다.
내가 지내던 하숙집과 학교는 비교적 분지의 변두리이자 상층부에 위치해있어서 대기오염의 직접적인 피해를 조금이나마 덜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학교에서 바라보는 시내는 마치 먼지 구덩이 같았고 쎈뜨로에 나갈 때면 별로 예민하지 않은 나도 매캐한 공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스모그는 황혼이 질 무렵에 층층이 다른 색을 내는 아주 멋진 풍경을 연출해준다는 점 외에는 그다지 좋을 게 없다.
이 숙명적인 스모그도 맥을 못 추고 사라지는 때가 있었으니, 바로 비가 오고 난 직후였다. 칠레의 늦가을-초겨울인 4-7월에는 우울할 정도로 비가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온다고 들었는데, 나는 마침 비가 그치기 시작하는 7월 중순에 도착해 2월에 칠레를 떠났기 때문에 처음 며칠을 빼고는 우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우기 외에는 비가 오더라도 금방 그치기 때문에, 비가 오기만 하면 나는 집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리는 산크리스토발 언덕으로 향했다.
비가 그치고 2시간만 지나도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스모그를 피해, 아직 촉촉히 젖은 산크리스토발의 아센소르(ascensor; 승강기)에 바삐 몸을 실었다. 산티아고의 몇 안 되는 관광지이기 때문에 늘 아센소르를 타려는 사람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지만, 아센소르 수용인원이 꽤 되기 때문에 조금만 기다리면 모처럼 깨끗한 산티아고 시내를 감상할 수 있었다. 시내에 내린 비가 눈으로 소복히 쌓여 하얀 이불을 덮은 안데스 산맥을 볼 수도 있고, 남미라고 하기엔 너무 삭막하고 촘촘하게 들어선 산티아고 시내의 건물들도 한 눈에 보인다.
탁 트인 산티아고 시내 풍경에서 언덕의 정상 쪽으로 눈을 돌리면, 산티아고 시내를 내려다보는 성모 마리아상이 보인다. 성모 마리아상을 받치고 있는 아주 작은 채플에는 성화가 벽 한 가득 그려져 있고, 가끔은 (확실하진 않지만 매 정시마다 틀어주는 것 같은) 주기도문이 곳곳의 스피커를 통해 방송되기도 한다. 천주교와 기복적인 종교심이 혼합된 결과로, 기원의 마음을 담아 달아놓은 매듭과 촛불이 한 켠에 가득하다. 남산에 잔뜩 달린 자물쇠를 보는 듯하다.
산크리스토발 입구와 정상에는,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 없이 솜사탕과 땅콩을 파는 노점과 온갖 조잡한 기념품을 파는 부스가 늘어서 있다. 하지만 복숭아 통조림에 밀알을 넣어 만든 일종의 식혜, 모떼꼰웨씨요(Mote con Huesillo)는 산크리스토발에서만 볼 수 있는 음료이니 꼭 시도해보길 바란다. 사실 쎈뜨로의 몇몇 광장 및 관광지에서도 팔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칠레인들은 산크리스토발을 연상시키는 음료로 모떼꼰웨씨요를 꼽는다. 아마도 산크리스토발 정상까지 걸어올라간 후에 보상처럼 마실 수 있는 달콤한 음료로 각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거리에서 파는 모떼꼰웨씨요는 먹어보지 못했지만, 칠레 친구네 집에서 우연히 만들어놓은 홈메이드 음료로 먹을 기회가 생겼다. 복숭아 통조림 맛이 잔뜩 나서 우리나라의 식혜보다 훨씬 더 달고 진하다고 느꼈다.
관광 안내 : 산티아고의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크리스토발, 그다지 높지 않고 아센소르도 잘 되어 있으니 가볍게 관광하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3-4분이면 올라가는 아센소르가 왕복으로 한국 돈 5-6천 원 했던 것 같으니, 돈이 아깝고 시간이 남는다면 걸어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도 즐거운 기억이 될 것이다. 다만 어두울 땐 아센소르도 막차가 끊기고 위험할 수도 있으므로, 어둑해질 땐 걸어내려 오기보다는 아센소르를 이용하여 적어도 오후 5시 전에 내려오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저녁에 산크리스토발에 간다고 하니까 현지인이 뜯어말리며 해줬던 조언이니 믿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