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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맑음 Dec 30. 2021

언어의 나무 - 2021년 한 해를 돌아보며..

언어의 나무 (이해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한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그대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해 주시기를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되지 않으면서 품위 있고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참으로 아름다운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할 수 있게 하고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닦는
여유와 능력을 나에게...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그대께서 도와주시어
좀 더 분별 있는 사랑의 말을 할 수 있도록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에 역행하는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과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의 용서를...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도와주시고,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그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원히 이어질 수 있게 도와주소서.

 위에 소개한 “언어의 나무”는, 저에게 조금 특별한 시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국어 과목에 실기평가가 생겼을 때였어요. “말의 중요성”이란 주제로 글을 써서 5분간 스피치를 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왜 말이 중요한지 논리 정연하게 글을 쓰고 발표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원고를 쓰려고 고심을 하던 차에 “언어의 나무"라는 시를 만났고, 이 시의 한 단락을 인용해 글을 쓰고 스피치를 했습니다. 결과는, 전교생 770명 중 99점으로 제가 1등을 했어요. 그날 제가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제가 쓴 글과 스피치가 훌륭했다기보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가 준 울림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이 시를 가슴에 품게 되었어요. 말 때문에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한 번씩 꺼내 읽는데, 그러면 제 영혼이 정화되고 깨끗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를 아무리 많이 읽고 다짐에 다짐을 한다 한들, 내일이면 까맣게 잊고 한순간 욱! 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 미운 말을 훅! 내뱉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지요..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알 수 없는 감금을 당하고 혀를 스스로 자르게 되는 이유도, 수많은 정치인들과 인기 연예인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이유 역시, 결국은 그가 남긴 말과 글이 살아 그에게로 되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던진 작은 말과 글들이 어딘가에 계속 살아 꿈틀거리다가, 거대한 몸집으로 되돌아와 내 목을 조이고, 내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왜 침묵해야 하는지, 왜 함부로 글을 쓰면 안 되는지 정신이 번쩍 듭니다.


2021년 6월 중순부터 이곳 브런치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170편이 넘는 글을 끄적였는데, 혹시라도 제가 쓴  글 때문에, 혹은 무심히 던진 댓글 때문에 상처 입으신 독자님 작가님들이 한 분이라도 계시다면,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6개월간  마음속 언어의 나무에는, 둥글고, 밝고, 향기롭고, 반짝이는 열매들만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사랑하는 독자님, 작가님들이 보내주신 위로와 격려, 응원의 댓글 덕분에 행복하게   있었고, 힘겨운 순간들도 지혜롭게 건널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2년 새해에는 글을 쓸 때, 댓글을 달 때, 더욱 신중하겠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사랑의 말을, 축복의 말을, 살리는 말을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 직장 동료들에게 더욱 그러겠습니다.


“언어의 나무” 시 속,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 구절..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구독자, 작가님들! 2021년 한 해 치열하게 살아내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2022년 새해, 축복만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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