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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름 Oct 20. 2019

니 노트를 몰래 봤어

고마웠다. 내게 묻지 않고 몰래 봐주었다는 것이. 내 노트에 누군가 관심을 가져줬다는 것이. 그 아이도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내 것에 뭘 적는지 궁금해서 슬쩍 읽어보았다고. 아마 그 애가 노트를 좀 봐도 되겠냐고 물어 왔다면 나는,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쑥스러운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은 멋쩍게 웃으며 노트를 책상 속에 도로 넣었을것이다. 겸손과 자신 없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이때도 만성이었으므로. 그 애는 내가 지은 구절들을 자신의 노트에 옮겨 적기까지 했다고 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말 그대로 감정의 과잉 상태를 유지해내는 그 시절에 그 애는 내 것을 가져가기까지 했으니 참 과잉이었겠다 싶다. 서로 가진 것이 차고 넘쳐서 조금 더 보탠다고 달라질 게 없었나.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노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서로에게 조금 더 다가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많은 말을 나누거나 팔짱 끼고 매점을 가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애가 하는 어떤 말들을 왠지 쉽게 이해하고 공감했다. 어쩌면 그 애도 ‘노트를 가진 친구’였기 때문에 더 이해하고 싶고 공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해하고 공감해야만 한다는 연대의식이나 책임감 같은 걸 느꼈을지도 모르고.     


지금은. 누군가에게 감정을 내비치는 것도 듣게 되는 것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내 것은 내 안에 두고 다른 이에게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감정의 부족 상태를 유지한다. 노트처럼 나와 비슷한 점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진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하긴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것을 몰래 열어볼 수 있을까. 그러고 싶어 하면서도 하지 못하겠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점차 잊어버리는 기분이다. 알았던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혹시 상대를 방해하는 꼴이 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결국 자기 방어가 되어버린다.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서만 노력해왔지 싶다. 나는 너와 가까워질 생각이 없는데?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먼저 다가가지도 못하고 상대 또한 가까이 올 수 없게 만들기를 반복하면서. 그러면서도 먼저 다가와주지 않는 상대를 탓하면서.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과거의 내 어떤 일들이 나를 사람 앞에서 끊임없이 주저하게 만들까.     


친구가 많았었다. 더듬어보면 내가 다가가기보다는 주로 상대가 다가와줬다. 여기에 익숙해져 버렸는데, 이제는 전만큼 누군가 친밀히 다가오는 일이 적어져서 자연스레 주변의 친구도 줄었다. 어릴 때 훈련을 잘해뒀으면 좋았으련만 이제 와서 친구 사귀는 법을 배우려니 어렵고 쑥스럽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얼마나 수동적이었는지,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와서야 느끼고 있다. 눈은 멀어지는 만큼 희미하고 흐릿하게 보이는데 사람 안에서는 늘 근시다. 난시일 때도 있고.      


나는 이제 그런 노트가 없다. 있다고 한들 내 노트 같은 것에 관심을 가져줄 만큼 풍부한 감수성의 상대를 기대할 수도 없다. 더는 귀여운 열여덟이 아니라. 이렇게 현실을 문자로 옮기면서 다시금 확실히 깨닫는다. 모든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럴 수도 없고. 다만 내가 호감을 느낀 사람에게만큼은 먼저 다가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이 좋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잰 체하거나 냉소적인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충분히 친절하고 편안한 사람이. 말을 자꾸 걸고, 만나자고 약속하고, 귀와 미소를 연 사람이.     


열여덟에 그 애는 이미 알았던 것 같다. 먼저 묻기보다 노트를 보고 난 후 내게 말하는 것으로 내 마음이 열릴 것을, 몰래 노트를 본 것에 대해 불쾌해하기보다 고마워할 것임을. 내가 써 놓았던 것을 일부 가져감으로써 나를 지지하고 있음을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 애도 자신의 노트를 누군가에게 그렇게 들켜버리길 바랬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애의 노트를 본 적이 없다. 내 노트를 봐준 것이 고마웠음에도 나는 왜 그 애의 노트를 발견해주지 않았던 걸까. 그 애가 쓴 그만의 문장이 소중하고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았던 걸까. 이제와 후회한다.      


현미경 없이도 대상을 연구할 수 있구나 싶다. 작은 노력으로 상대의 작은 것을 볼 수 있구나. 그것이 작을수록 더 깊이 다가갈 수 있구나. 현미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상대가 이 렌즈 안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참 확실히도 틀린 생각이었다. 현미경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더 가치가 있다. 현미경 없이도 상대의 어떤 점을 알아내고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관계니까. 줄곧 알고 있었지만 생각을 정리하거나 말로, 글로 옮기지 않으면 알고 있었던 게 맞나 싶은 일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거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어쨌든 이렇게 하나 더 깨닫는다. 그때의 나를, 너를. 지금의 나를, 내 주변의 누군가를. 몰래 들여다보고 나지막하게 너를 어쩌면 이해할 수 있겠다고 그런 너의 점이 좋다고, 참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고백해야만 한다는 것을, 상대에게 오래도록 남을 좋은 자국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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