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머리끈을 고르지 못했다. 구슬이나 고리가 달린 것, 해바라기가 붙은 머리망, 딱삔, 꽃삔. 네모난 레모나 철통엔 형형색색 악세서리들이 가득했다. 촘촘한 꼬리빗과 분무기를 가지고 야무지게 머리칼을 매만져주던 손이 없던 이른 아침 나는 풀어헤쳐진 머리로 아빠 손을 잡고 터미널로 갔다. 막 자다 일어난 행색으로 한쪽에 서서 이리저리로 움직이는 아빠 모습을 보며 ‘엄마는 어디 있나.’ 생각했다. 불안감 없이.
엄마가 가장 멀리까지 간 곳은 어디였을까. 가는 동안 우는 대신 가만히 창밖을 바라본 적이 있었을까. 어쩌면 엄마의 눈이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갈 수 없었는지 모른다. 더 먼 곳, 혹은 바로 앞의 바깥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뒤로 난 발자국을 더듬을 수밖에는 없었는지도. 아니, 그녀 스스로 길을 잃기에 당신 입으로 씹어주는 마른 오징어까지 날름 받아먹던 자식들이 언제까지고 어리기만 했기 때문일지도.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부재는 세 번이다. 유치원을 들어가기 전, 초등학교 4학년 쯤 그리고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닐 때. 첫 번째 엄마의 부재에서 나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어렸고 또 울음바람을 해댈 만큼 그 시간이 길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엄마가 있다는 믿음을 의심할 수 없었으므로 떼를 부릴 동기도 없었다. 엄마의 두 번째 부재를 겪으며 이 날이 문득 떠올랐다. 복기해보니 저때가 첫 번째구나 싶었다. 두 번째는 머리가 조금 컸다고 엄마가 모자라지 않게 돈을 챙겨 갔을까 걱정됐다. 첫 번째가 성공적이지 못했고 또 이미 수화기 너머로 엄마를 들었기 때문에 이때도 나는 엄마가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축축한 목소리로 잘 지내라고 말했다. 푹 젖은 목소리가 엄마를 그대로 담고 있어서 무거웠다. 이 무게로는 어떤 것을 타든 적재초과였다. 오직 엄마의 두 다리만이 그녀를 어딘가로 데려다 놓을 수 있었는데 그 어딘가는 결국 다시 집이었다. 엄마에게 가장 먼 곳은 땅끝마을 해남도 오지 산골 강원도도 아닌, 내가 없는 곳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엄마는 아빠가 처음으로 만든 신용카드로 기차표를 끊었다. 카드를 쓰면 문자 내역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시골에서 농사일만 하던 엄마는 몰랐다. 이것이 세 번째.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카드를 쓰면 내역이 뜬다는 사실을 엄마가 정말 몰랐을까.
엄마는 나에게 만큼은 한 번도 아무말 없이 떠나지 않았다. 예고는 없었지만 본편에서는 언제나 신호를 켰다. 그것으로 당장 엄마가 내 옆에 없지만 말 그대로 지금 없는 것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존재가 눈앞에 없는 두려움보다 세상 물정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삶을 살아 온 엄마가 혼자서 식당에 앉아 밥은 먹을 수 있을까, 낯선 곳에서 무언가를 묻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은 붙일 수 있을까가 염려됐다.
떠난다는 것은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진짜로 떠나는 것이라고. 나를 찾을 수 없게 한다는 건 숨는 것과는 다르다. 숨는다는 건 언젠가 들통날 수 있음을 기대하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엄마와 닮았다. 가끔 도망치고는 누군가에게 발견 당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걸 보면.
한 영화에서 아주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교사인 그는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 없는 사람 취급 당한다. 그런 그가 학교 밖 철제 펜스에 기대 이쪽을 바라보며 몸부림치고 있을 때 주인공이 다가가 괜찮냐고 묻는다. 그럼 그는 놀랍다는 듯이 되레 묻는다. ‘내가 보이냐’고. 내가 보이냐니. 유령이 주인공인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살아있는 사람이 그토록 반사적으로 뱉는 것을 보며 맘 끝이 섰다. 나는 누군가에게 보일까. 나는 누군가를 보고 있을까. 그때 엄마는 스스로를 감추는 것으로 자신이 보이냐고 묻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주인공이 건넨 물음처럼 종종 내 존재를 인식해준 사람에게서 말 이상의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다시 살아갈 힘을 짧고 의례적인 문장에서 찾을 수 있을 때가 있다. 나는 그때 엄마의 수 없는 울음을 듣고 보면서 어떤 말을 건넸을까. 나는 위로였을까.
끊임없이 존재를 증명 받고 싶어 하는 건 존재의 기본 욕구다. 자신의 생활권에서 스스로를 잠시 지우는 것으로 오히려 나를 더 드러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 존재의 가치를 재고하기 위해 한국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문득 나는 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떠나 여기에 와 있을까 싶었다. 도망친 게 맞다. 숨은 것도 맞다. 그러나 내 빈자리를 보며 누군가 느낄 외로움이 나를 위안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더 순하면서도 복잡한 이유가 있다. 그냥의 내가 그냥의 나를 알고 싶은 마음, 뭔가 다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수행하고 있던 역할을 팽개친 뒤의 홀가분함 같은 것들. 나는 가끔 그날의 엄마가 마른 눈으로 세상을 봤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대단한 것을 얻은 것은 아니나 마음이 전보다 제법 여유로워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