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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름 Aug 29. 2019

헤어지는 중이 아니라 결혼하는 중이었다고

자꾸 화가 났던 건 봄날이었는지 가을날이었는지 이상하게도 기억나지 않는 그 날, 진심으로 그의 손이 잡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설렜던 마음이 민망했다. 긴가민가의 균형을 잃지 않던 그를, 혼자 헷갈려하며 품었던 반절의 기대와 반절의 의문이 한심해 헛웃음이 났다. 예쁜 척은  어땠는지. 다시 생각하니 쥐구멍도 크다.     


그는 오래 만난 연인과 결혼했다. 결혼 소식을 알았을 때 치졸하게 굴 수도 있었다. 내가 뒤통수를 맞은 세기만큼은. 샅샅이 뒤져서 그의 아내에게 디엠 정도는 보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상상에서 그쳤지만.      


말하자면, 그가 그의 연인과 결혼을 약속하고 난 후 몰려드는 헛헛함과 싱숭생숭한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내가 있었다. 이전에 그와 나는 나름 정신적 교류를 하며 잘 지내던 사이였다. 친구가 된지는 7년 정도. 관심군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 클래스에서 처음 알게 됐다. 내가 한국을 2년 간 떠나 있을 때는 간간히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와 일상, 시와 심정 따위를 나누기도 했었다. 꽤 아름다운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와 내가 아주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는 조금 근사해져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만나자는 연락을 한 그가 나는 혼자인 줄 알았다. 사는 지역이 달랐기 때문에 나를 만나러 오는 그의 수고나 내가 찾아갔을 때 맞아주는 호의도 그럴듯했다. 한두 번 옛 연인에 대해 은근슬쩍 물은 적도 있었다. 머뭇거리던 그의 태도를 보며 바보 같게도 나 좋을 대로 해석했다. 오래 만난 사람에 대해 떠벌이고 싶지 않은 어떤 예의 같은 것으로. 왜냐하면 내 상식선에서는 그들이 어쩌면 지금 헤어지는 중이겠구나 하는 게 최대치였으니까. 결혼하는 중일 것이라는 건 내 상상력 밖의 일이었다.      


백번 양보해 오버랩의 상대가 되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바람의 상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우습게도 조금 지나고서야 왠지 그가 여전히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손을 잡고 싶었으나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건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거리감 때문이었다고 지나서야 깨달았다. 스스로 그와의 만남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 그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결혼식이 정말 임박했기 때문이었는지 서로 연락을 하지 않게 됐다. 그의 짧은 외도에 의도치 않게 동참한 게 한 달? 한 달 반? 정신을 더 빨리 차리고 상처를 줬으면 좋았으련만 결국 상처 입은 건 나였다.     


내가 알던 그는 비겁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는 비겁해졌다. 그의 삶 전체라기보다는 삶의 일부 혹은 그저 신체 일부, 기억의 일부 정도는. 그가 아내를 볼 때 마다라기보다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나를 만났을 때 그들이 나눈 화제가 다시 꺼내지거나, 그때 그녀가 입었던 같은 톤의 블라우스가 건조대에 걸려 있을 때 정도는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거나 자책하겠지. 따뜻한 해가 널찍한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날, 소란스러우면서도 평화로운 거리를 걸으며 시원한 커피를 마시기도 서로의 말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그러다가 말이 끊겨 어색하기보다는 오히려 같이 있음을 더 확연하게 느꼈다면 솔직해야만 한다. 나는 그때라도 당신의 손이 잡고 싶다고 그래도 되냐고 확인했어야 했고, 그는 그때라도 내 손을 잡지 않는 것으로 안도할 것이 아니라 오해하지 말라고 지금 이 걸음의 의미는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단도리했어야 했다.     




짝사랑의 기억이 별로 없는 나에게 이건 아주 창피하게 되어버린 짧은 짝사랑이다. 그가 아빠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전만큼 그가 괘씸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조금은 괘씸하다. 여전히 괘씸한 건 이런 기억을 만들어준 탓이기도 하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사람을 만날 때 상대의 마음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겨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금만 괘씸한 건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백한 적 없는 그를 기대한 건 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가 떠오른다. 상대를 좋아하는 걸 그 대상이 눈치 채지 못했을 때까지만 좋아하다가 눈치를 채고 나면 좋아하기를 그만두고 그제야 고백을 한다는 여자 캐릭터였다. 그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마지막 남은 감정의 찌꺼기를 퉤 뱉어버리는 심정으로 좋아했었었었다고 고백한다.’고. 감정의 찌꺼기가 쌓이는 것에 비해 처리가 더뎠지 싶다. 뱉어내지 않으니 마음에는 늘 자리가 부족했다. 그를 그리고 그때의 나를 이것으로 퉤 뱉어버리고 나면 마음에 빈자리 하나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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