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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름 Sep 07. 2019

그 편지는 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 이런 것 하나쯤은 있지. 내 것과 함께 다른 이들의 것까지 다 찾아내 불태우고 싶은 것. 이를테면 중학교 졸업앨범 혹은 고등학교 졸업앨범 혹은 대학교 졸업앨범 같은 것. 범위를 줄이면 상대와 나만이 공동 소유한 기억이나 사물 같은 것도 있다. 계속 ‘그런 것’을 쌓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생 같기도 하고.     

 

어쨌든 엄청나게 많은 ‘그런 것’들 중에 단연 손꼽히는 그런 것이 있다면 바로 그에게 쓴 장문의 편지다. 내 인생의 첫 삼각관계이자 아마도 마지막 삼각관계가 될 그때. 우리는 어설픈 종이에 최선을 다한 글씨로 시간이 지나 기름이 아래로 가라앉아 언뜻 보기에는 담백한 것 같기도 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심지어 편지를 곧바로 편지지에 적지 않는 나는 내가 그에게 썼던 편지 내용이 그대로 담긴 노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온라인 보낸 편지함, 받은 편지함도 아니고.      


그가 나에게 준 편지는 여전히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하지만, 많은 용기를 가지고 내가 쓴 편지를 읽어보면 처참한 기분이다. 그래서 무척 두렵다. 그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이 편지를 다시 꺼내 볼 수 있음이. 두껍고 성능 좋은 키친타월이나 기름종이 같은 것을 동봉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는 몰랐으니까.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게 됐다는 것. 과거는 고칠 수 없고 흔적을 지울 수도 없는데 어쩌자고 지금 알아버리는 건지. 어쩌자고 보낸 편지함을 열어본 건지. 종종 영화나 책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 과거를 지워주는 기계가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대부분 기억을 지우더라도 운명, 삶은 결국 뒤바꿔놓을 수 없고 바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 귀결되는 이야기다. 나는 그렇다. 정말로 그런 기계가 있다면 후회 없이 아주 많은 것을 지울 수 있으리라고. 지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기억의 반 이상이 날아가면 어쩌나 그게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그 역시도 나에게 준 편지를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그때의 자신을 지나치게 훤히 보이는 언어로 남겨버린 것에 대해서. 관계의 삼각을 이루던 한 각은 이미 결혼을 했고, 편지를 보내고 또 받았던 한 각은 가이드가 되어 여러 나라의 여러 도시를 맴돈다. 나머지 한 각인 나는 이런 글을 쓴다. 나중에 이 글을 쓴 것을 후회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정말로 그가 내게 남긴 편지를 후회하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그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나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내게 있어 지우고 싶은 기억은 대부분 그런 것 같다. 기억을 공유한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상대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서 확신 없는 과거에 자신감을 잃는다. 그리고는 기억의 주변부를 맴돌며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찾아내 후회한다. 그가 별 것 아니라고 넘기면 내게도 별 것이 아니게 된다. 나는 별로라고 느껴도 그가 참 좋았다고 회상하면 다행스러운 것이 되고, 나는 좋았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순간이라면 내게서도 곧 시들어버린다.      


내 과거가 과거의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있구나 싶다. 여전히 어떤 이가 나를 바보처럼 생각하면 어쩌나, 어떤 이가 나를 실수 많은 사람이라 여기면 어쩌나. 그때 나는 외모가 단정했던가, 수다스러웠던가, 과묵해서 불편하게 하진 않았던가. 이미 지난 일들을 가지고 오래 씨름하며 결론짓지 못하고 있다. 허리에 고무줄을 묶고 당겨 나갈 수 있을 만큼 달려 나갔다가 결국은 다시 끌려오는 기분이 익숙해 당황스럽다. 그 앞에서 바보 같은 행동을 한 것도, 실수를 자꾸 저지른 것도, 단정하지 않은 외모도, 어떤 때는 수다스럽다가 또 과묵해지는 것도 실은 모두 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상대에게 남기지 못한 것을 참지 못한다. 과거나 기억을 지워주는 기계가 아니라 정신 계몽을 해줄 기계가 필요하지 싶다.     


아주 나중에 만나서 국물에 소주를 먹자고 그와 약속했었다. 아직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가 이 약속을 지키고 싶어 할지 자신이 없다. 이 약속을 떠올릴 때마다 그의 편지와 나의 편지가 딸려 나온다. 내가 정말로 이 편지를 지우고 싶어 하는지 그로 하여금 내가 지우고 싶은 과거가 되어 있을까 봐 선수 쳐 이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지. 늘 그렇듯 알고 있지만 결론을 미룬다. 아마 그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하기 전까지. 늘 그렇듯 과거가 멀리 있을수록 안심한다. 해결이 필요한 과거를 붙들어 현재의 코앞에 끌어와 두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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