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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름 Sep 22. 2019

그렇게 다 배설해버리는 거지


어려운 말은 아닌데, 읽거나 발음하면 낯선 단어가 있다. 내게 ‘배설’은 그런 단어 중 하나다. 자연 다큐멘터리나 강연자들이 티브이에 나와서 쓰는 진짜 ‘배설’과 우회적 표현으로의 ‘배설.’ 일상에서 이 말을 들은 일이 얼마나 될까. 그때 그녀는 스물여섯쯤. 영화 또는 글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또 아주 잘 해내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약간은 냉소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고, 나는 여전히 영화와 글쓰기가 좋지만 스스로의 주재를 알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만드는 영화에 그런 나는 스태프로 참여했었다.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참 좋았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농담을 던지고, 가난하지만 가난은 흠이 아니고 술 한 잔 마실 돈만 있으면 됐다고 하는, 살을 에는 추위에 새벽까지 밤을 새우면서도 서로의 격려를 목도리 삼아 일하는. 대학원을 다니던 선배와 그 무리가 작업하던 영화였다. 선배의 콜에 며칠 도와준 게 다였지만 그들의 재능과 열정에 가슴이 부풀었었다. 똑똑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내가 한편으로는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촬영을 마치고 또 편집도 마치고 스태프들끼리 하는 시사에 그들은 나를 초대해줬다. 그때 어떤 장면에서 그녀가 뇌까렸다. ‘그래 저렇게 다 배설해버리는 거지.’ 똑똑한 사람은 적재적소에서 똑똑한 말을 뱉는구나가 내 첫 번째 감상, 저 장면이 가진 의미가 그런 거구나가 두 번째 감상이었다. 아, 나는 왜 저런 말을 할 줄 모를까가 두 번째 반 정도의 감상이었고.     


스무 살, 세 명의 새파란 청년들이 논둑을 향해 소변을 보던 장면이었던 것 같다. 이들의 젊음은 너무 젊어서 여전히 넘치고 발산하지 않으면 터지기 전까지 혹은 터지고 나서도 버겁고 주체할 수 없고 또 순진하고 찬란하다는 걸. 그 시기를 지나왔고 또 다른 시기를 겪고 있는 젊음은 이렇게 공감했다. ‘저렇게 다 배설해버리는 거지.’라고. 내게는 술에 취해 까마득히 어린 후배들 앞에서나 있어 보이려고 지껄이는 말이었겠지. 그게 어디 ‘배설’뿐일까. 스물여섯쯤의 그녀는 그런 말을, 다시 말해 그런 사고를 아주 자연스럽게 또는 설득력 있게 소리로 뱉었다. 그게 어디 ‘배설’뿐일까.     


말로라도 하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있다. 물론 말로 하더라도 결국은 극복하지 못하는 일들도 있지만. 그녀는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굳이 공통을 찾자면 여자였고, 나만큼 작았다. 이게 다인 건가.. 어쨌든, 그러나 그녀는, 나에 비할 바 없이 글을 잘 썼고, 연출을 잘했고, 말을 잘했고, 똑똑했고, 당당해 보였다. 불안을 불안으로, 사랑은 사랑으로 더하거나 덜지 않고 받아들였고 또 헤어지는 사람이었다. 주위로부터 그녀는 인정받았었고 지금은 더욱 그렇다. 나는. 나는 이제야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소용없는 질투, 열등감 같은 것에서 벗어나고자. 배설해버리고자.     


다행스러운 것은 내 못난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게 점점 쉬워진다는 거다. 하나씩 인정하다 보면 나중에는 인정할 게 없어져서 이제는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럼 스스로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겠지. 이제 몇 개나 남았으려나.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그들의 기억 속에 내가 어떻게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글쎄 잘 모르겠다는 거다. 종종 그때의 내 나이, 나만큼 수줍고 불확실한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나서 내가 더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거나 스친 인연쯤으로 넘겨버릴 때 일순 이 날의 내가 떠오른다. 그들에게 결국 시시한 사람으로 혹은 더는 부르지 않는 이름으로, 궁금하지 않은 과거로 되어있진 않을지.      


잊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가 누군가를 잊을 때 혹은 잊은 후에 느끼게 된다. 섭취했던 추억, 기억이 시간이라는 소화액을 통해 어떤 때는 순식간에 어떤 때는 오래 걸려 흡수할 것과 배설할 것을 나눈다. 같은 기억을 공유한 다른 이들도 내가 흡수한 기억의 양만큼, 소화에 걸리는 시간만큼 함께 가지고 있어 준다면 좋으련만.


나는 여전히 열등감 많은 사람이지만, 열등감에 형태를 부여하고 나면 버릴 수가 있어짐을 안다. 그래서 그녀를 향한 내 열등감을 두 글자의 단어로 뭉쳐서 이렇게 버리려고 한다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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