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세 가지 해석층

마히토의 무의식과 후계자로서의 우리(스포주의)

by 호원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작으로 알려진 2023년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야오 특유의 부드러운 그림체와 다채로운 표정, 따뜻한 색감이 인상적이었지만, 철학적인 소재와 ‘탑’을 필두로 하는 신비주의적 세계 묘사에서 '역시 하야오답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작품이었다.


주인공의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이 쉽지 않은 전개를 보며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를 깊게 생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를 볼 때보다 다 보고 몇 시간이 지난 뒤 오히려 더 매력을 느끼게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또한 하야오스럽다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작품의 해석이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작품에 여러 층이 동시에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몇 개의 지층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듯한 인상인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층: 주인공 중학생 소년 마히토의 꿈과 환상



두 번째 층: 마히토가 어머니 히사코의 죽음을 지나 새어머니이자 이모인 나츠코를 어머니로 받아들이는 통과의례



세 번째 층: 큰아버지로 상징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자신과, 마히토(혹은 히사코)로 상징되는 후계자 문제



이 세 가지 해석 층은 환상적 순수의 세계를 현실에 꽂아주는 구조물인 ‘하늘에서 떨어진 탑’을 중심으로 미끄러진다.




1. 첫 번째 층: 마히토의 부조리에 대한 대응 상상과 현실 감내 사이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H. 해리스는 '현대미술, 그 철학적 의미'에서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대응을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한다.


1. 부조리를 피해 상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2. 부조리한 현실과 싸우고 변화시킨다.


3.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내한다.


이 작품에서도 부조리에 부딪힌 마히토는 1. 과 3. 의 대응 사이에서 갈등을 한다. 즉, '탑' 안의 순수의 공간으로의 도피 혹은 '' 너머 현실을 감내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적 성장사이에서 고민하고 선택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마히토가 맞닥뜨린 부조리한 현실과 상상적 공간, 통과의례적 구조물인 탑이 놓여 있는 것이다.


어머니 히사코의 죽음, 그리고 그 여동생 나츠코와의 재구성된 가족 관계는 어린 소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균열을 만든다. 특히 나츠코의 임신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마히토에게는 “어머니의 자리가 대체된다”는 위협 신호로 작동한다.

이때 탑 세계는 하나의 기능적 공간으로 읽힌다. 그것은 완전히 주관적 꿈도, 완전히 객관적 이 세계도 아닌, 마히토의 정서와 강하게 공명하는 중간 지대다. 이곳에서 등장하는 인물 배치는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정밀하다.


히미는 불을 다루는 소녀로 나타나는데, 이는 화재로 사망한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 재구성으로 읽힌다. 즉 무력하게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불을 다루는 능동적 존재로 재형상화된 것이다. 불에 타 죽지 않고 오히려 불을 지배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슬픔으로부터의 ‘역전적 승리’를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냉혹한 현실의 반전을 예비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어머니 히사코(히미)의 죽음의 이미지. 만지자 마자 물로 변하며 스러진다. 주인공의 엄마에 대한 강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젊은 히사고. 화재로 사망한 그녀는 탑내에서 불을 다루는 능력자로 묘사된다. 마히토의 바램이 담긴 걸까.

젊은 키리코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는 보호자이자 동반자이며, 동시에 마히토와 동일한 위치인 우측 관자놀이에 상처를 공유한다. 작품 초반 마히토는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뒤 이모와 그녀의 아이를 새어머니와 동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돌로 머리를 찍어 우측 관자에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이야기 후반까지 이어지다가 마지막엔 현실을 받아들이며 흉터 곧 흔적으로만 남는다.



이 상처는 바로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일종의 자해이자 울분의 표식으로 읽힌다. 그런데 젊은 키리코 역시 동일한 위치에 상처를 가지고 등장한다. 이는 키리코와 마히토의 동일시라기보다 고통의 외부화와 공명에 가깝다. 마히토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가 고립된 것이 아님을 목격한다. 그녀는 탑 내부에서 젊은 인도자이자 조력자, 그리고 강력한 부적 인형으로서 다층적으로 존재한다.



젊은 키리코 우측 관자에 상처가 있다. 사진은 두건을 쓴 상태.


2. 두 번째 층: 마히토의 통과의례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큰아버지가 제시하는 후계 제안은 이 세계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드러낸다. 그 제안은 달콤한 유토피아의 초대라기보다, 불완전한 세계를 유지하라는 무거운 책임 요구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탑 세계는 단순한 도피 공간이 아니라, 마히토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통과의례적 시험장으로 변한다.

이 관점에서 큰아버지는 마히토의 무의식적 세계를 창조한 또 다른 자아로도 읽힐 수 있다. 부조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희적 상상 공간, 즉 독립적인 무의식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다. 감내해야 할 부조리가 격해질수록 기존의 불완전한 내면세계는 요동치고, 그 균열 속에서 ‘후계’라는 형태의 선택 압력이 등장한다. 그러나 마히토는 결국 상상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부조리를 현실에서 감내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렇듯 마히토의 최종 선택은 명확하다. 그는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세계의 관리자 자리를 거부하고 현실로 돌아온다. 이 선택의 의미는 단순한 귀환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어머니를 붙잡아 두려는 유아적 욕망에서 한 발 물러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나츠코의 아이—가 이어 갈 현실의 시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결정이다. 즉 이 첫 번째 축에서 영화는 결국 이렇게 묻는다.

부조리를 제거한 세계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부조리가 남아 있는 현실을 살아낼 것인가.



마히토는 후자를 선택한다.

다만 이 해석에는 한계도 존재한다. 탑 세계가 그의 내면과 강하게 공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현실 세계에서는 아버지와 직원들, 할머니들이 실종된 인물을 찾는 시간이 병행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러한 모순을 의도적으로 매끄럽게 봉합하지 않은 채 통과시키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나츠코

히미와의 만남,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와라와라—를 목격하는 경험은 죽음과 탄생이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음을 소년에게 조용히 각인시킨다. 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어머니의 형상과, 위로 떠오르며 새로운 생으로 향하는 존재들의 이미지는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면서도 결국 같은 시간의 흐름을 공유한다. 나츠코의 임신은 피하고 무시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생명의 소멸 후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고 그것은 마히토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 괴로울 수 있으나 견뎌야만 하는 것이야 말로 현실이고 성장통이다.



그렇게 본다면 마히토의 귀환은 단순한 현실 복귀가 아니라, 상실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조용한 통과의례의 완료에 가깝다. 그의 우측 관자에 남은 흉터처럼 무엇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 세계로 돌아오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만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



3. 세 번째 층: 창작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 문제


마히토의 큰아버지이자 미야자기 하야오 자신의 상징.



동시에 이 작품에는 주인공 개인 서사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상징적 층이 존재한다. 이 작품이 미야자키 하야오란 거장의 은퇴작임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탑 세계의 창조자이자 관리자 역할을 하는 큰아버지는 단순한 이야기 장치로 보기 어려운 메타적 무게를 지니게 된다. 그는 오랫동안 '순수의 세계' 미묘한(불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블록의 탑으로 유지해 왔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더 이상 그것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는 후계자를 찾는다.



이 설정은 자연스럽게 감독의 자기 반영적 고백으로 읽힌다. 후기 작품들에서 반복되어 온 주제—늙은 창조자, 불완전해진 세계,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의 이양 문제—가 여기서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특히 블록으로 유지되는 불안정한 세계 구조는, 더 이상 완벽한 질서를 설계할 수 없다는 창작자의 자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중요한 점은 영화가 후계의 성립이 아니라 후계의 거부를 선택한다는 데 있다. 마히토는 세계를 이어받지 않는다. 이 장면을 메타 층에서 보면, 이는 단순히 “다음 감독을 지명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 애초에 완전한 계승이라는 발상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읽힌다. 마치 감독의 계승에 대한 희망은 작품 내 큰 아버지가 이어나가길 원했던 순수의 세계만큼, 현실에서 동떨어진 세계에 대한 집착처럼 보일 정도로 자기 회의적인 면을 드러낸다.



결론: 봉합되지 않은 세 축의 공존


이 작품의 독특함은 위의 세 층이 완전히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마히토의 개인적 애도 서사와 그의 통과의례 그리고 창작자의 메타적 고백은 서로 강하게 공명하지만, 끝내 완전한 동일 구조로 수렴하지는 않는다. 그 미세한 어긋남이 영화 전체에 특유의 불안정한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결국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담백하다.

완벽하게 정리된 세계를 물려받을 것인가.

아니면 상처와 부조리가 남아 있는 현실을 계속 살아갈 것인가.


소년은 현실로 돌아온다. 소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히토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항상 이런저런 선택을 하게 된다.


그중에서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선택은 늘 거창한 순간에 찾아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한 소소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문득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선택 앞에 서게 된다.


그대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대들,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결코 쉬운 대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선택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흉터가 생긴 불완전한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전하고 완전한 를 원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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