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론’의 저자로 유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글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인물은 뜬금없지만 시인 기형도였다. 롤즈의 논리적이고 건설적인 논의에 대한 흔한 반감일까. 아니면 시인의 방관적 직관에 대한 반성일까. 시집 ‘입속의 검은 잎’으로 유명한 이 시인은 1989년 시집을 준비하던 중 종로 파고다 심야 극장에서 새벽에 향년 29세로 사망했다. 암울하고 비관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빈자들과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을 시니컬하게 표현하던 그의 시들이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법적인 질서의 근간을 바로 세우고 현실적으로 조금씩 바꿔 나가자던 롤즈의 건설적인 주장에 대비되어 그저 방관자로서 자조할 뿐이라 부르주아처럼 반박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사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가치론적인 문제에서 글을 적어보고 싶었다. 즉, 암울한 글만 쓰고 희망이 없는 기형도의 시는 독자들을 한없이 우울하게만 만든다는 점에서 무의미함을 넘어 해악을 끼치는 작품이 아니던가? 하물며 롤즈 같은 정의론자의 저작에 비한다면?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시가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그의 시의 본질적인 가치는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 글은 기형도에 관한 것이다.
올바른 글? 올바른 생각?
기형도의 시를 읽으면 유려하고 독창적인 표현에 감탄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의 시는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낙관적인 미래 전망이라고는 일말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갓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 켜진 빈 트럭이 점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 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희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쏜 아직 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 중에서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 중에서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 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오후 4시의 희망’ 중에서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 다니는 저 표정
삐걱대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밋빛 인생’ 중에서
이처럼 그의 시는 대체로가 아니라 전부 다가 어둡고 우울하다. 그의 이러한 감각은 그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969년의 시 ‘위험한 가계’를 보면 열 살 무렵 기형도의 아버지는 사업을 실패하고 풍병으로 쓰러졌다. 가난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콩나물을 키우시고 큰누이는 공장을 다녔다.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던’ 큰누이는 공장에서 야근 수당을 받았으며, 작은 누이는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나온 스웨터’와 같은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녔다.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위험한 가계’中
삶이란 공장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고 한겨울의 철근처럼 차가운, 존재가 떨어져 나간 현실에 머물러야만 한다. 어딘가 유토피아적인 곳으로 도망칠 구석이 없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고 나서 집에 오다가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자던 그날 어린 기형도는 늦은 밤 작은 누이의 몸에서 나는 석유 냄새를 맡고 그는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어 보냈다.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중략)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위험한 가계’中
부서진 이파리란 개천으로 띄어보낸 단순한 상장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누나들은 모두 공장으로 갔고 그는 학교를 갔다. 아버진 패배감에 절어있었고 어머니는 막연하게 멈춰 서 있었다. 이파리란 이미 어릴 적에 부서진 동심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 그는 그대로 자라나 ‘샛강’의 우울한 삶을 노래한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 中
이후의 모든 시의 소재가 샛강의 삶에 국한된 것은 아니나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극단적으로 비극적인 세계관이 형태만 달리하여 서로 다른 배경에 검은 물감처럼 흩뿌려질 뿐이다. 기형도의 우울하고 퇴폐적인 감각, 결여된 역사적 전망에 대한 시학적 비판은 절망적이고 구원의 여지가 없듯이 보일 정도이다.
잠시 롤즈로 돌아가 보자. 삶이란 이처럼 비극적으로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는 바로 이런 가난의 극복을 ‘추상과 비극적 감상의 망토’ 바깥에서 찾으려 한다. 롤즈는 정의론에서 어떤 누구도 富를 소유할 권리를 애초에 가지지 않고 완전히 공평하다는 전제하에 새로운 자본주의의 질서를 제안한다.
자연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나는 요소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정의론' 中
롤즈는 타고나거나 주어진 요소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다루는 방식이 불공정한 것일 수 있다며 언제나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한에서 부자에게 부를 허용하자는 복지주의적 자본주의의 설득력 있는 제안을 한다.
퇴폐적이고 결여된 역사적 전망을 가진 기형도의 시들이 언뜻 소심하고 무기력하게 보일 수 있는 그런 건설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우울한 눈초리로 우울한 시만 써버린 기형도는 우울증을 유도해서 독자에게 해악만 끼치는 퇴폐적 시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까? 그의 시에 끌리는 까닭은 단순히 부조리, 퇴폐, 절망의 매력 때문이라고만 해야 할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부터 그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걸까?
진실에 관해.
롤즈의 견해는 건설적이고 타당해서 설득력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비참한 현실은 슬프고 절망적일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개선해 가려는 의지를 포기한다면 지금의 현실도 긍정적 미래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기형도의 시가 무의미하거나 해학을 끼친다고만 생각되진 않는다. 그리고 가난을 어떤 식으로든 환기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개선도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다소 소극적 가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시의 가치는 삶의 본질과 관련된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그의 시니컬한 시선 뒤의 섬세한 감수성과 현실감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예술은 바로 그곳에 있다.
흔히 생각하기로 A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를 생각한다. 무엇인가로 인해 얻는 긍정적인 성과의 기대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방식이다. 롤즈의 저작을 통해 우리는 보다 정의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깨달을 수 있고 개선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실 자체, 본질적인 실체 자체가 중요한 상황도 있다. 그것은 다른 뭔가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우리 자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롤즈가 현실은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변형도 의지도 가하지 않은 날카로운 시인의 감성은 현실을 그 자체로 드러나게 한다. 기형도의 시에서 주는 중요한 혜택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의 시는 소유적이지 않고 존재적이다. 롤즈의 글이 소유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기형도의 시가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 주의적 감상을 피하기 위해 도심 거리에서 시를 적었다고 한다.
가난을 개선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는 시간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1대가 아니면 2대에서, 2대가 아니면 3대에서, 장기 100년 계획을 내다보고 사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비참한 사람들은 어제에도 오늘에도 미래에서 스러져간다. 스러져 갈 것이다. 툇마루에 앉아서 분가루 휘날리던 여자도, 엉망으로 취한 군인도, 희고 아름다운 여공, 건강한 아이들, 그리고 기형도 본인도 모두 일렬로 스러져갔다. 추상화된 긍정 속에는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유토피아적 망상이 담길 때도 있다. 추상화된 긍정은 언제다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만 진정한 의미가 생긴다. 현실을 안다는 것은 찰나의 생을 살다가는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비밀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절망감을 이해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롤즈의 글이 본질과 부적합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희망을 요구하는 바람은 찰나의 인생과 여공의 휘청거리는 걸음과 같은 힘겨운 현실에도 기원을 두고 있다. 기형도의 염세주의에 본질이 담긴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는 존재를 비춰볼 수가 있다. 흔들리고 괴로워하는 나약한 존재, 거짓을 싫어하고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던 존재, 감상과 추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싶었던 존재, 내가 생각하는 기형도의 가치란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지나쳤을지 모를 나 자신의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로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을 진실로서 표현하려는 세심한 시인의 표현에 있다고 본다.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植木祭'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