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위에 새로 나는 길

by 한아

우리가 밥을 먹던 식당 방 한쪽 벽엔 작은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었다. 평소에는 보드를 비워두었지만 피정이나 침묵의 아침 식사 시간에는 음악이 흐르곤 했고, 음악의 제목이 보드에 적혔다.


그 화이트보드는 말이 '화이트'지 말끔히 지워지지 않은 흔적으로 얼룩덜룩했다. 문구점에서 파는 작은 어린이용 화이트보드라 지우개 성능도 좋지 않았고 수녀원의 침묵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 남겨진 흔적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주방을 담당하는 소임인 '주방종'을 맡았던 어느 날, 그 침묵의 흔적이 답답해 보였었는지 휴지를 들고 보드를 닦다가 잘 안 닦여 주방 세제를 묻혀 닦아보았다. "다라라~~~" 머리에서 효과음이 들리 듯 휴지가 지나간 자리에 새하얗고 맨질맨질한 길이 생겼다. 그 순간, 내 마음에도 시원하게 길이 뚫렸다.


설거지할 때 쓰는 세제가 이런 말간 길을 만들어낼 줄이야! 휴지도 새롭고, 세제도 고맙고... 그리고 무엇보다 '버리고 새로 사야 하는 거 아닐까?' 싶던 화이트보드가 다시 제대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야, 지워지네. 안 사도 되겠다."

선생 수녀님의 말씀에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건 없어요. 맞는 지우개만 찾으면 다 지워져요. 그러니까 지울 수 없는 상처도 없어요."

수녀님은 웃으셨고, 그때의 그 말이 내 안에 안도감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나는 잠시 지켜보았다. 그래서인지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트라우마'라는 단어에는 강한 힘이 있다. 그 단어 앞에서는 감히 지우개나 세제 묻힌 휴지를 쉽게 찾아들고 닦아내는 시늉을 하기가 어렵다. 언제까지나 '트라우마'라는 단어 뒤에 숨어 상처를 꽁꽁 싸매어둔 채 살아가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처는 계속 덧나면서 나를 아프게 할 것이고 더욱더 곪아 들어갈 것이다.


얼룩덜룩한 자국이 닦이는 걸 보며 느낀 기쁨도, 성취감도, 결국엔 "괜찮아질 수 있다"는 신호였던 것 같다. 지우는 일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상처를 지울 수 있는 그 '알맞은 세제'를 찾는 여정, 그것이 어쩌면 치유이고,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방식, 방향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이렇게 새 길을 만들어 가며 그 길을 걸어보려 한다. 내 속에 묻어둔 나의 지난날과 그날들에 대한 나의 상념들 사이로 나만이 걸어갈 수 있는 내 길을 찾아보려 한다. 그 여정을 이렇게 정리하고 기록하며 '진짜 나'와 만나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