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취했고, 남편은 도망쳤고, 나는 괜찮았다

by 한아

어버이날을 이틀 앞둔 저녁, 가족끼리 시내에 새로 생긴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사진이 예쁘게 잘 나오는 화려한 상차림으로 유명한 집이라 웨이팅이 많다고 해서 일부러 덜 붐빌 것 같은 어버이날을 비낀 평일 저녁으로 날을 정했다. 약속 당일 아침, 아빠에게 확인전화를 넣으며 아빠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싸늘한 분노가 차올랐다. 아침부터 아빠는 술에 잔뜩 취해있는 것이다. 이틀 전 집에 찾아가서 얼굴 보며 한 약속인데 그걸...

(그 당시를 떠올리며 글을 쓰는 지금도 어금니와 턱 주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시작되면 2~3일은 술만 드시는 게 아빠의 패턴이다. 전화를 돌려 모임 약속을 취소하고는 어지러운 마음으로 남편과 하던 분갈이를 계속했다. 아빠를 향한 차가운 분노와 속을 찌르는 남편의 냉정한 비난에 반응하는 뜨거운 분노를 함께 지켜보며... 분갈이가 끝날 때쯤엔 머리의 차가운 분노도 손 끝의 뜨거운 분노도 사라져 있었다.


뿌듯한 기대감으로 분갈이해 놓은 화분들을 보며 점심 라면을 같이 먹는데 남편이 문득 물었다.

"힘들 때 자긴 어떻게 해?"

"나는 감정정화를 하니까 힘듦을 지켜보고 느끼죠.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일로 그 시간을 지나기도 하고."

"좋아하는 거 어떤 거? 듀오링고? chat-gpt랑 놀고?"

"그렇죠. 근데 최고는, 그 감정을 느껴주고 몸에서 그 감정이 떠나게 하는 거 같아요."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요즘 왜 그렇게 문피아를 열심히 봐요? 밥 먹을 때도 보고."

시선을 돌리며 잠시 침묵하던 남편이 말했다.

"힘들 때 좋아하는 일을 한다며."

"... 많이 힘들어요? 일이 힘들어?"

"일이 뭐가 힘들어? 늘 하는 일인데... 열심히 해도 뭔가 바뀌는 게 없잖아. 그냥 계속 그대로야."

"오빠는 삶에서 대체 어떤 걸 기대하길래 변화가 없다고 해요? 따지고 보면 우리 많은 게 변했는데."

"..."

답이 없다. 아침처럼 다시 마음이 서서히 차가워진다.




저들을 어쩌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지?

이만하면 다 괜찮은데 뭐가 문제라 저러는 거지?

이러고 있는 늬들이 문제다, 내게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아빠는, 아무런 문제없는 잔잔한 호수 같은 우리 가족의 삶에 늘 돌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내게는...
남편은 자신의 욕심과 기대 사이에서 스스로를 지치게 하며, 삶의 돌파구로 나와의 결혼을 택했지만, 생각만큼 변화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아 있는 사람이다. 역시, 내게는...

그래서...

또 하지만, 그 둘에게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지금 나는...

장사하던 때,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생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해 그저 몸으로 때웠던 시간도 떠오르고...

가슴 중앙, 왼쪽 어깨, 왼쪽 목 밑이 긴장되며 뭉친다.

가만히 지켜봤다...



'마음의 짐'...

조용히 짊어지고 있는, 견디고 있는 이의 마음의 무게...

내 주변 사람들이 감정과 현실로 휘청일 때 나라도 그 중심을 반듯하게 지켜내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내 가슴에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 대신 짊어지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늘 괜찮은 나'가 있었다. 같은 현실에서 '나는' 괜찮은데, 왜 '늬들은' 안 괜찮아서 괴로워하는데? 하는 '원망하는 나'가 그 이면에 있는 것이고...


어릴 때부터 나는 '괜찮은 나'의 역할을 했다. 가족 안에서 문제없는 쪽, 속 썩이지 않는 쪽,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 맞추는 쪽, 요구하지 않는 쪽...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는 동안, 나는 누구에게도 '나도 힘들어', ' 나도 답답해', ' 나도 도움이 필요해', '나도 모르겠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내가 숨긴 나의 모습은 도움이 필요하고 정말 갈망하는데 그 말을 하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이다.


나는 그렇게 징징대지 않는 것이 뭐랄까? 성숙? 품격?이라고 여겼다. 세상에, 특히 이 대한민국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아쉽지만 도움이 없는 것도 내 팔자려니 했다. 도움을 얘기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비슷한 처지인데 힘든 일 얘기해 봐야 징징대는 것 밖에 안 되는 것 같고, 또 사람들은 실제 나만큼 나의 문제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상처받기도 했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는 딱히 마음에 차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내 문제는 내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속을 들여다보니 곪아 있는 내 속이 보인다. 그래, 겉은 괜찮았다. 혼자 감당해 온 사람의 적당한 힘, 지혜, 편안함의 여유를 훈장으로 달 수 있었지만, 내 속에서는 외로움과 불안이 말 그대로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 마음의 외로움과 불안이 현실에서 아빠가 무너지고 남편이 힘듦 속에서 웹소설로 도망가는 모습으로 그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남편은 '힘들다'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짜증 난다'라고 둘러 표현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마음이 힘들다고 먼저 스스로 얘기했다.

남편의 '힘들다'라는 표현은 어떤 '문제'도 아니고, '약함'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의 한 조각을 말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다 괜찮은데 왜 괴로워하냐'라고 방어하며 내 속의 똑같은 감정을 억눌러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그 표현이 숨겨둔 내 마음의 작은 표현이었다.


미안하다.

있음을 인정해 주지 않아서...

오랫동안 모른 척하고 없는 척해서 정말 미안하다. 내 것이었는데 아닌 척했었다.

분명 '힘들고 불안함'이 있었는데, 그건 나쁘고 나약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정말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이제 '힘듦과 불안'을 인정하고, 즐거움, 평화로움만큼, 똑같이 소중하고 귀하게 여길게.

이렇게 너희를 만나고 알아보게 되어서 반갑고 다행이야.

(깊고 시원한 트림이 올라온다)

언제든 어느 때든 너희를 알아보고 외면하지 않고 너희가 하는 말을 들을게.




내가 외면한 감정들은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이제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없애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본다. '이런 감정이 있구나', '지금 이렇게 느끼는구나' 하며, 숨기지 않고, 괜찮은 척하지 않고, 그 감정이 내 몸과 마음을 통과하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감정정화는 무엇을 해결하거나 바꾸는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진실하게 머무는 일이다. 도움을 구하지 못했던 나, 억울하고 외로웠던 나, 늘 괜찮은 역할을 해내야 했던 나... 그 모든 '나'를 다시 품어주는 일이다. 그렇게 내가 나를 도와주는 길이다. 나만큼 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있나? 그러기에 내가 나의 친구가 되어주는 길이다. 그리고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안아줄 수 있을 때, 나 또한 타인의 마음을 판단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지켜내는 용기이고, 나의 삶을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진심이다. '괜찮은 나'로 버텨가는 삶이 아니라, '진짜 나'를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 더 편안하고, 더 자유롭고, 더 깊은 평화를 준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그리고, 나는 그 길 위에 있다. 지금 이대로, 딱 이만큼의 나로 충분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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