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눈이 떠짐과 동시에 '무거운 마음'이 감지되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만 정리하고 거실로 나와 '새벽의 나의 자리'에 앉았다. 이 '무거운 마음'은 어떤 얘기를 전하려는 걸까? 눈을 감고 왼쪽 가슴 바로 밑에 손을 얹었다. '무거운 마음'과 고요하고 내밀한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무겁고, 밀도가 높은 덩어리로 느껴졌다. 왼쪽 가슴 전체로 퍼진 묵직한 기운은 어깨를 지나, 왼쪽 관자놀이 아래 귀 옆까지 당기듯 스며들었다. 그 자극에 내 주의는 점점 또렷해졌다. 잠시 후, 덩어리는 슬며시 움찔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몸에 힘을 빼고, 그 미세한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작은 트림이 터져 나왔고, 콧구멍으로는 강한 기운이 빠져나갔다. 나는 코를 한껏 찡긋이며, 그 여운을 천천히 풀어내듯 내보냈다.
어깨가 살짝 풀리나 싶던 찰나, 작년인가? 남편의 추천으로 보았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한 장면이 눈앞에 스친다.
습지에서 혼자 노니는 소녀...
그리고 이어지는 영화의 장면들...
소식이 끊어진 첫사랑, 자신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선택, 생물학자가 되어 살아가는 노년의 모습...
'무거운 마음'이 펼쳐준 이미지는 단순히 영화의 줄거리가 아니었다. '나'를 상징하는 '나'에 대한 메시지였다. 어릴 적부터 나는 사람들과 섞이며 어울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나는 마치 바다에 뜬 채로 육지를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 물속에서, 물 밖 육지의 사람들과의 거리를 느끼며 혼란스럽고 어색하게 살아왔다. 게다가 나는, 내가 있는 물속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늘 바깥세상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물속에 있는 내가 할 수 없는 움직임, 맞지 않는 속도에 자꾸 마음이 걸렸다. 그러면서 나는 그 어긋남을 나의 부족함으로만 여겼다. 영화의 주인공과는 다르게 나는 나의 '내면의 습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내 삶'으로 살기까지 꽤 오랜 방황의 시간이 있었다.
감정 정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내면의 물의 세계로 스스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이 익숙해지면서 평안을 만나고 나의 움직임을 찾고 나의 리듬을 만들어 냈다. 세상의 규칙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나만의 세계에서 내 본연의 색이 드러나고 내 존재가 서서히 스스로의 온기를 되찾았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본연의 삶을 갈망해 왔다. 영화의 '습지의 소녀'는 버려지고 고립되고 겨우 생존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스스로 자라나며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습지와 깊이 연결되어 마침내 그 습지를 '자신의 세계'로 만들어 버렸다. 그 모습은 내가 그토록 닿고 싶었던 내 안의 원형인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동경했고, 그녀 안에서 나를 보았던 것이다.
잠시 뒤 떠오른 두 번째 이미지...
얼마 전 여성새로일하기 센터에서 만났던 강사님이다.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으로 정직하게 땅을 일구며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
삶을 경영하는 사람...
삶을 마주하는 방식에서 나는 그녀와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었다. 삶의 파도가 덮칠 때 나는 그 흐름에 나를 맡기려 힘을 빼는 노력을 했다면 그 강사님은 잠시 표류하더라도 다시 머리를 들고 자신의 방향으로 전진하는 쪽이었다. 나는 그분의 전문성이나 경제적 성취도 부러웠지만, 현실을 품에 안고도 흔들림 없이 삶의 주도권을 단단히 쥐고 있는 그 힘에 깊이 감탄했다.
내 안에 이렇게 두 여성이 있구나!
고요한 습지의 소녀와 현실을 설계하는 강단 있는 여인...
이들은 내 안에서 분리되어 있던 자아의 양극이다. 한 명은 자연과 감정의 신전에서 고요히 살아낸 나였고, 한 명은 이제 세상에 펼치고 싶은 미래 자아의 그림자이다.
나는 오랫동안 내면을 탐색하며 정신과 감정의 세계에 깊이 잠겨 있었다. 하지만, 이제, 물질적인 기반 위에서 '삶을 내 손으로 짓고 싶은 열망'이 솟구치고 있다. 내 안에도 저 강사님처럼 단단하고 실천력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현실에서 그 힘을 펼쳐서 그 힘을 눈으로 확인해 보라고 나의 감정이, 무의식이 이렇게 두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감정정화는 억눌러 놓았던 감정을 풀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서 분리되어 있던 두 여인을 하나로 포개는 작업이었다.
자연과 고독, 자생력...
그리고 현실과 주도감, 실천력...
두 자아의 결이 포개지며, 나는 비로소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선명해졌다.
이렇게 합쳐진 여인이 펼쳐낼 나의 현실이 너무나도 설레게 기대가 된다. 지금부터는 이 멋진 여인이 조금씩 드러날 수 있도록, 손짓 하나, 한 걸음에도 내 의식을 담아갈 것이다. 그렇게, 이 현실 위에서 내 삶을 내 손으로 아름답게 지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