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구조 신호

by 한아

새벽 3시 26분...

어제도 비슷한 시각에 눈을 떴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오른쪽 콧구멍을 타고 싸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한 1~2분쯤 흘렀을까? 이번엔 오른쪽 콧구멍에 콧물이 가득 차더니 그대로 흘러내렸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코를 풀고 거실로 나왔다. 이틀째 새벽은 같은 방식으로 나를 깨우고 있다.


내 비염은 주로 이른 봄 환절기에만 심해진다. 그런데 6월, 그것도 새벽에 콧물 때문에 잠에서 깨는 일은 거의 없다. 더구나 아무 증상 없이 잘 자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곧바로 콧물이 흐른다? 분명, 평소의 계절성 비염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지난 이틀 내내,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불안을 의식의 중심에 두고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감정을 저장하고 감정은 몸을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새벽 3시에서 4시, 무의식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 무의식이 콧물의 방식으로 내게 말을 건 것이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시, 호흡에 마음을 실었다. 의식은 자연스럽게 가슴 전체와 어깨 뒤쪽으로 향했고, 그곳에 고정된 듯 머물렀다. 마치 얇게 시멘트를 발라 굳힌 것처럼, 단단하고 숨 막히는 감각이었다. 이 시멘트는 피부 아래로 스며들어 피부 호흡을 막고 있었다. 왼쪽 기도도 막아서 내 호흡이 거칠고 힘들게 느껴졌다. 가슴 전체는 갑옷처럼 단단해서 폐가 제대로 부풀어 오를 공간조차 부족했다. 심장 박동도 아주 무겁고 둔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내 몸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숨 쉬기조차 버거운 상태로 생존하고 있었다.


몸이 그렇게나 힘겨운 상태로 생존해 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가슴 안쪽에서 불안이 다시 감지되었다. 아주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 연약한 신호를 겨우 잡았다. 둔중하게 뭉쳐진 기운은 점점 더 밀도가 더해지며 그 덩어리가 드러났고, 마침내 떨림의 근원까지 의식이 닿았다. 떨림은 미세하고 약했지만 몸 전체로 퍼져나갔고 내 몸은 그 떨림에 맞서느라 그렇게 필사적으로 힘을 주고 있었다.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고 조용히 떨림의 근원에 의식을 머물게 했다.



떠오르는 이미지 하나.

머리 어딘가에 박혀서 절대 떠나지 않는 그날, 그 장면.


막냇동생이 아직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 가족은 2층 양옥집, 할아버지 댁의 1층 끝방에서 살았다. 대문 옆 가게에서 엄마 아빠는 닭을 튀겨 팔았고, 대문 가까이에 넓은 마루와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집은 다른 가족이 세 들어 살았다. 우리는 그 집 뒤로 돌아 들어가는 작은 부엌이 딸린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

엄마 아빠가 내복차림으로 옆집 마루에서 서로 드잡이를 하고 있었고, 나는 막내를 등에 업고 다른 동생은 내 옆에 바짝 붙인 채 그 집 담벼락 모퉁이에서 엄마 아빠를 보며 울고 있었다.

아빠는 주사가 심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이면, 엄마를 붙들어 앉혀놓은 채 몇 시간을 퍼부어댔고, 기분이 틀어지면 술상을 엎거나, 집안 살림을 부수는 일도 잦았다. 그런데 그날은 무엇 때문에 아빠가 그토록 폭발했는지는 모르겠다. 엄마가 옆 집으로 도망쳤고 아빠가 그 뒤를 따라나간 것이다. 잠에서 깬 우리도 울면서 쫓아 나갔다. 옆 집 사람들은 자다 깨어 마루에 나와 부부를 말리려 했고, 위층에 할머니, 큰 엄마도 허겁지겁 내려오셨다.


그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 마루 위의 내복차림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담벼락에 붙어 울고 있던 우리 셋의 모습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흐릿하다. 그러곤 어찌어찌 잠이 들었나 보다. 까만 새벽, 갑자기 맑게 정신이 들었다. 엄마의 움직임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들기 전부터, 그 소리를 듣고 있었고, 또 그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도 알았던 것 같다. '엄마가 떠나려는구나.' 숨이 막힐 듯 겁나고 두려웠지만,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엄마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저 행동을, 그간의 엄마 사정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엄마가 떠날 준비를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천천히, 또렷하게...



여전히 너구나.

또 너였구나.

그날의 너는 그렇게 오롯이 박제된 채로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있구나.

이 아이를 구해야 하는구나.

그때에 그대로 갇혀버린 너를 내가 구해야 하는구나.


나는 그 세 아이를, 지금의 내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이 조금씩 풀릴 수 있도록 집 안에 따뜻한 기운을 가득 채웠다. 소파에 셋을 나란히 앉히고, 포근한 담요를 덮어주었다. 따뜻한 코코아와 쿠키, 갓 데운 빵을 아이들 앞에 내놓았다.

"얘들아, 우리 이거 같이 먹자."

동생 둘은 조용히 차와 간식을 먹고 이내 곤하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린 나는, 어딘가 흐릿하고 희미하게만 보였다.


나는 어린 나만 따로 안방으로 데려왔다. 아이를 이불속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가슴께를 토닥였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천장의 한 지점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아이의 손과 발을 부드럽게, 아주 천천히 주물러 주었다. 아이는 그대로, 아무 말도, 아무 움직임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

그제야 아이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눈물을 쏟았다. 나는 꼭 껴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주문처럼 되뇌었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

아이는 한참을 울다가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내 품 안에서 잠들 듯 숨결이 잔잔해졌다. 그 숨결이 나에게까지 스며들었다. 나의 가슴도, 목도, 코도, 조금씩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벽의 콧물은 그날의 어린 내가 보내온 구조 신호였다. 기억만 바래졌을 뿐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 시간에 갇힌 나의 일부는 지금까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몸을 덜덜 떨며 홀로 긴 세월 버려져 있었다.

오늘, 나는 그 아이를 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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