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형상 1

내 어깨 위의 여인

by 한아

'대체 너 왜 이러니?'

'뭐야? 뭐 때문에 이래?'

'이런 네가 좀 싫다, 한심스럽다.'

잠에서 깨자마자 거실로 나와 무거운 몸을 소파에 툭, 던져 흩트려 놓았다. 그대로 가만히 있으려니 한숨인 듯 한탄인 듯 속에서 말들이 새어 나왔다. 눈은 건조해서 뻑뻑하고 밤새 막힌 코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도 멍하지만 내 속에서 올라오는 나에 대한 답답함과 한심함, 혐오스러움은 엉망인 몸 상태에 댈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현장이 있는 포항으로 돌아간 후, 이틀 동안 나는 말 그대로 쇼츠만 봤다. 아침에 일어나 브런치 글 조금 쓰고 배 고프면 밥 먹고, 그 외 나머지 시간은 모두 쇼츠만 봤다. 밤이면 눈이 아프고 머리도 지끈거리는데도 오른손의 두 번째 손가락의 '까딱거림'은 고정된 것처럼 멈추어지지 않았다. 설거지도 미루고 벗어놓은 옷도 그 자리에 그대로 둔 채로 말이다.


그렇게 널브러져 내 속의 혐오감이 온몸을 뒤덮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어딘가 떠다니는 상념들 속에서 어제저녁 무렵 남편과 통화했던 내용이 잡혔다. 남편은 꽤 값이 나가는 유산균을 사고 싶다고 했다. 4통을 사면 4통을 더 준다며 "이거 사도 돼?" 했다. 건설현장의 노동자인 남편은 이 번 달에 일을 한 날보다 하지 못한 날이 훨씬 많다. 그러니까 한 달 벌어 한 달 생활하는 우리는 다음 달 생활비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사는 데에 거침이 없는 남편은 지금 우리의 경제 사정보다 내 눈치가 더 보였나 보다. "좋을 대로 하셔요. 뭐, 어찌 되겠지." 하며 말리지 않았다. 감정정화를 하고부터는 돈 문제에 마음이 훨씬 덜 쓰인다고 생각했는데 이 대화가 잡힌 건 역시 '돈 문제' 인가? 싶었다. 그 순간 트림이 쉴 틈 없이 올라오고 재채기가 연속으로 터졌다. 이것은 감정정화 중 흔히 일어나는 몸의 반응이다. 몸이 내 질문에 응답한 것이다.

'응, 돈 문제 맞아.'


'돈 문제라고?

돈에 대한 두려움을 그렇게나 들여다보고 정화했는데 , 또 돈 문제라고?'

내 몸을 뒤덮은 혐오와 한심스러움의 감정 근원이 또 돈이라니, 힘이 빠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돈에 대한 나의 무의식이 혐오와 한심스러움으로 나를 몰아대고 있는데... 나는 다시 감정에 의식을 두었다. 그러다가 카드 대금 결제일이 바로 내일인데도 카드 대금 명세서 확인조차도 하지 않고, 결제 계좌들 준비하는 일도 계속 미루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동시에 남편의 충동적이고 중독적인 쇼핑 습관에 대한 원망, 다음 달은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내 안에 남아있음을 받아들였다.


다시 맞닥뜨린 단단하고 높은 벽...

그 벽 앞에 힘이 빠져 천천히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어디선가 큰돈이 떨어지면 좋겠다'

씁쓸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 순간, 양쪽 어깨가 강하게 의식되었다. 서늘한 기운이 머물다가 사라졌다. 그 찰나, 내 어깨에 올라타 있는 양쪽 다리를 보았다. 조선시대 평민 복장인 듯 버선발에 꼬질꼬질한 속곳 바지를 입은 다리였다. 어릴적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 떠올랐다. 이거 '귀신이야?' 순간 서늘하게 무섭긴 했지만 '나는 감정정화 작업 중이다. 이것은 내 감정의 형상화일 뿐이다.' 하며 계속 작업을 이어갔다.


다시 눈을 감고 어깨에 의식을 두었다. 깊은 슬픔과 답답함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넌 누구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보았다. 그러자 그것이 내 머리 위에 털썩 주저앉아 치맛자락이 얼굴을 덮어버렸다. 시야가 가려진 채로 너무나 절망스럽고 답답했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하는 심정이 이런 건가 싶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옥죄고 있는 이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내 너를 알아야겠다.

'너 누구니? 일단 내려와 볼래?' 그러자 그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작고 왜소한 몸집에 산발한 머리카락. 회색빛 해골 얼굴에 누렇게 큰 눈알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나와 말을 나누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생각보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내 앞에 마주 선 채로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어떤 느낌도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고 나도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바닥으로 풀썩 스르르 내려앉아 엎드린 채 가만히 있었다. 울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나 작은 몸집이다. 엎드려 울고 있는 여인에 대한 그저 작은 연민 외에 다른 특별한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여전히 가슴은 무겁고 답답했지만...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얹고, 천천히 토닥이다가 가만히 안았다. 여인은 마치 재로 만든 형상처럼 아무런 밀도감도 부피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에서 싸한 기침이 터져 나오고 트림이 잇다라 올라왔다. 몸의 흐름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 순간 내 안에 작은 외침이 지나갔다. '풀려났다'... 머리가 갑자기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지만 묶여 있던 실타래의 한 가닥이 툭, 하고 끊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련한 안도감이 따라왔다.



- 이 이야기는 <감정의 형상2>에서 이어집니다 -







작가의 이전글새벽의 구조 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