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경 전 성장 골든타임을 놓치지 마세요
지난 글에서
"유전은 천장이 아니라 범위를 정해주는 것이다."
그 범위 안에서 최대한 위쪽으로 자라도록 돕는 것이 성장 치료의 핵심이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자아이에게는 이 이야기에 단서가 하나 붙습니다.
"초경 전 골든타임을 놓치지 마세요"
초경이 시작되면 몸에서 에스트로겐이 급격히 분비됩니다.
에스트로겐에는 재미있는 이중성이 있어요. 사춘기 초반에는 성장호르몬 분비를 자극해서 키를 키워주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일정 시점이 지나면 뼈의 성장판을 닫는 명령을 내리는 것도 바로 이 에스트로겐입니다. 처음에는 성장을 돕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는 셈이에요.
초경은 성장의 절정이 지난 뒤에 옵니다. 키가 가장 빠르게 크는 시기는 초경 6개월 전쯤에 이미 지나가 있어요.
초경이 왔을 때
가장 빠른 성장은
이미 끝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초경 이후에는 얼마나 더 클 수 있을까요?
교과서에는 "초경 후 평균 6~7cm 더 자란다"라고 나와 있어요.
하지만 평균의 데이터이고, 초경 시기에 따라 이후 성장량은 크게 달라져요.
성장판을 닫는 것이 에스트로겐이기 때문에, 초경이 일찍 온 아이는 그만큼 에스트로겐에 일찍, 오래 노출된 셈이에요. 성장판 입장에서는 마감 시간이 앞당겨진 거예요.
초경이 빨리 오는 것은 성장의 관점에서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성조숙증이라는 말, 들어보셨을 거예요.
만 8세 이전에 유방 발달이 시작되거나, 만 10세 이전에 초경이 오는 경우를 말합니다.
진료실에서 보면 이런 아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어요.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거나, 체중이 또래보다 많이 나가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환경에 있는 경우가 특히 많습니다. 특별한 질환 없이 이런 생활환경의 영향만으로도 발달이 앞당겨지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한의학적으로는 이런 상태를 몸의 근본 에너지는 부족한데 열 에너지만 과도하게 앞서 나가는 상태로 봅니다. 쉽게 말하면 재료는 부족한데 불만 세게 달구어지는 상황이에요.
이런 아이들에게는 과도한 열을 식혀주고 성호르몬의 이른 분비를 조절하는 방향으로 접근합니다.
동시에 수면의 질을 높이고, 소화 흡수를 끌어올려 성장의 기반이 되는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해요.
성조숙증처럼 약물 개입이 필요한 단계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 직전의 회색지대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현대 아이들의 초경이 과거보다 빨라지고 있다는 건 통계로도 확인돼요. 서울대 의대 연구에 따르면 현재 국내 여아의 초경 평균 연령은 11.8세로, 1990년대 후반(13세)보다 약 두 살이나 앞당겨졌습니다.
원인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체중. 지방 세포가 많을수록 렙틴이라는 호르몬이 많이 분비돼요. 렙틴은 뇌에 "몸에 에너지가 충분히 쌓였다"는 신호를 보내는데, 뇌는 이걸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만큼 몸이 준비됐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사춘기 스위치를 일찍 켜버립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아이에게서 초경이 빨리 오는 경향이 있는 건 이 때문이에요.
수면 부족.
밤에 분비되는 멜라토닌은 사춘기를 시작하는 뇌의 신호를 억제하는 역할을 해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화면에서 나오는 청색광은 뇌가 "아직 낮"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멜라토닌 분비를 방해합니다. 늦게 자는 습관이 쌓일수록 사춘기가 앞당겨질 수 있어요.
환경호르몬. 플라스틱 속 환경호르몬은 에스트로겐과 유사하게 작용하거나, 사춘기를 시작하는 뇌의 신호 시스템을 자극해 이른 성숙을 유발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언제가 적기일까요?
성장 치료의 황금기는
성장판이 활짝 열려 있고
성호르몬의 영향을
아직 크게 받지 않은 시점입니다.
여자아이라면 만 8~10세,
초경 시작 최소 2~3년 전이
가장 개입 효과가 큰 시기예요.
아래 중 하나라도 해당한다면, 지금 바로 성장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만 8~9세인데 가슴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 키가 또래보다 갑자기 훌쩍 컸다가 멈춘 것 같다
✔ 체중이 늘면서 성장 속도가 변하고 있다
✔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거나 늦게 잔다
✔ 엄마의 초경이 빨랐다 (초경 시작 시기는 유전 경향이 있어요)
✔ 이미 초경이 시작됐지만 성장판이 아직 열려 있다는 말을 들었다
늦었다고 포기하실 필요는 없어요.
초경 이후라도 성장판이 완전히 닫히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 남은 시간을 얼마나 잘 쓰느냐의 문제예요. 이미 시작됐다면 지금이 가장 빠른 때입니다.
잘 먹고, 잘 흡수하고, 잘 자고, 몸의 불필요한 열을 줄여주는 것. 여자아이의 성장 치료도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다만 초경이라는 변수가 더해진 만큼,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조숙증은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수면, 체중, 스트레스, 식습관이 조금씩 쌓이면서 몸이 서서히 그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거예요. 반대로 말하면, 그 환경을 잘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아이가 타고난 키를 온전히 다 쓰려면, 몸이 최적의 상태여야 합니다. 잘 자고, 잘 먹고, 불필요한 자극 없이 몸의 리듬대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장판은 골연령 검사로 지금 얼마나 열려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초경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때예요. 초경이 이미 시작됐다면, 지금이 그다음으로 좋은 때입니다.
아이의 성장이 걱정되신다면 함께 도와드릴게요.
다정한 혜선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