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의 '숨은 키'를 찾아서

한의사가 들려주는 우리 아이 성장 이야기

by 혜선생



지난 글에서 "키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서 유전이 약 70~80%, 환경·영양·생활 습관이 약 20~30%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 20~30%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드리려 합니다.


성장 클리닉을 찾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검사를 해도 특별한 이상이 없는 경우입니다. 성장호르몬 수치도 정상, 갑상선도 정상, 골연령도 실제 나이와 비슷합니다. "특별한 이상이 없는 작은 아이"입니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적당한 '치료'가 딱히 없습니다. 그럼, 그냥 기다려도 될까요?




"특별한 이상이 없는 작은 아이들"을 자세히 보면, 키 하나만의 문제인 경우가 드뭅니다.

식욕이 유독 없거나, 자주 배가 아프다고 하거나, 잠을 깊이 못 자거나, 땀을 지나치게 많이 흘리거나, 자주 피로해하거나 하는 경우들이 함께 따라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장 속도가 또래보다 유독 더딘 것은 몸 어딘가의 기능이 최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검사는 "질환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는 데 탁월합니다. 하지만 질환은 아닌데 기능이 떨어진 상태, 그 회색지대를 한의학에서는 오히려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소화 기능, 수면의 질, 에너지 대사 이런 것들을 끌어올려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성장 환경 자체가 달라질 수 있거든요.


검사 결과가 정상이라는 건 다행이지만, 그게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숨은 키'라는 개념

성장 의학에는 *예측 성인 키(Target Heigh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키를 기반으로 아이가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전적 키를 계산하는 것인데, 계산법은 이렇습니다.

남아: (아버지 키 + 어머니 키 + 13) ÷ 2

여아: (아버지 키 + 어머니 키 - 13) ÷ 2


여기에 ±10cm 범위가 정상 범주입니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이 예측 키는 최대값이 아니라 중간값입니다. 즉, 영양 상태와 수면, 운동, 스트레스, 건강 상태에 따라 이 예측 키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유전은 '천장'이 아니라 '범위'를 정해주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숨은 키라고 부릅니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키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 상단에 가깝게
자랄 수 있도록 돕는 것.
한의학적 성장 치료의 핵심입니다.



진료실에서 자주 만나는 ‘숨은 키’ 아이들

✔ 감기에 자주 걸린다

✔ 밥을 잘 안먹거나 배가 자주 아프다고 한다
✔ 잠들기 어려워하거나 깊이 자지 못한다
✔ 땀을 너무 많이 흘리거나 잘 지친다
✔ 이도 늦게나고 발달도 늦은편이다


잘 안 먹는 아이 — 소화기가 먼저입니다

진료를 하다 보면 성장이 또래보다 느린 아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밥을 잘 안 먹습니다.


"밥상 앞에서 매일 전쟁이에요."


이런 아이들, 부모님이 더 힘드시죠.


한의학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비위(脾胃)가 약한 아이로 봅니다. 비위는 현대 의학의 소화기계에 해당하는데, 단순히 음식을 소화하는 것을 넘어서 먹은 것을 에너지로 전환하고 온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기능을 총괄합니다. 비위가 약한 아이는 먹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거나,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거나, 먹어도 살이 잘 안 찌거나, 늘 피곤해 보입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한약 치료는 소화 효소를 자극하고, 위장의 긴장을 풀어주고, 장 운동을 활성화하는 처방을 씁니다. 치료를 받은 아이 부모님들은 "요즘 밥을 잘 먹어요"라고 하세요. 잘 먹는 아이는 당연히 더 잘 자랍니다.


잘 먹는데도 안 크는 아이 — 흡수가 문제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밥은 잘 먹는것 같은데 장이 약해서 흡수가 잘 안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좋은 영양소를 잘 먹어도, 장에서 제대로 흡수되지 않으면 영양이 그대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런 아이들은 종종 대변 상태가 고르지 않고, 대변 주기가 불규칙하며, 먹은 것이 그대로 나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자주 배가 아프다고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소화기를 튼튼하게 하는 치료를 통해 흡수율을 높여주면, 같은 양을 먹어도 몸에 더 많이 쌓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키로 이어집니다.


타고난 기운이 약한 아이 — 신허(腎虛)

한의학에서 성장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개념이 *신(腎)*입니다. 현대 의학의 신장과 이름은 같지만, 한의학의 신은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성장, 발육, 생식, 뼈와 치아의 건강, 호르몬 기능까지 총괄하는 근본 에너지에 가깝습니다.


신기(腎氣)가 충분한 아이는 뼈가 튼튼하고, 성장이 활발하고, 기운이 넘칩니다. 반대로 신기가 허약한 아이, 즉 신허(腎虛)인 아이는 타고난 에너지 자체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어떤 아이들이 신허일까요?


선천적으로 허약하게 태어난 아이, 잔병치레가 많고 체력이 많이 소모된 아이, 그리고 이가 유독 늦게나고 성장이나 발달이 또래보다 늦어지는 아이들이 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녹용을 포함한 처방이 큰 도움이 됩니다. 녹용은 한의학에서 수천 년간 성장과 발육을 돕는 약재로 쓰여왔는데, 현대 연구에서도 성장인자(IGF-1) 활성화와 연골 세포 증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쌓이고 있는 약재입니다.




잘 먹고, 잘 흡수하고, 잘 자고, 몸의 균형이 잘 맞는 아이는 자신이 타고난 범위의 최대한 위쪽으로 자랍니다. '숨은 키'를 꺼내주는 것이 한의학적 성장 치료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여자아이의 경우는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초경이 성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많은 부모님들이 놓치고 있는 그 타이밍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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