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시스템이 남긴 위대한 기록과 비극적인 대가
"빛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고, 동전에는 반드시 양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할지라도, 인생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반드시 공존합니다."
이 냉철한 양면성의 철학은 프로 스포츠라는 비즈니스 현장을 관통하는 진실입니다. 승리라는 찬란한 빛 아래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희생이라는 그림자가 요구되기 때문이죠. 한국 프로야구는 지난 40여 년간 이 양면성을 가장 극적으로 시험해 온 무대였으며, 그 첫 번째 이야기는 OB 베어스 원년 우승을 이끈 김영덕 감독과 박철순 투수의 비극적인 서사에서 시작됩니다.
경영학적 질문: 이 역설적인 신화는 오늘날의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가장 첨예한 질문을 던집니다. 단기적인 초고속 성장을 위해 조직의 핵심 자원(인재)을 극한까지 소모하는 전략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 성과의 대가는 누가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프롤로그: 우승의 월계관, 그 피할 수 없는 대가
(베어스 원년 우승의 현장)
1982년, 하위권 전력으로 평가받던 OB 베어스가 한 시즌 22연승과 한국시리즈 초대 우승이라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미국 프로야구 더블 A까지 경험한 에이스 박철순의 커리어는 이 원년 우승을 위해 많은 부분을 희생했는데요. 선수 본인의 인터뷰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 만큼, 이후 부상을 달고 살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자랑스러운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승리라는 '밝은 부분' 뒤에는 '어두운 부분'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허리 통증에 '대포 주사'를 맞고 등판해야 했던 선수의 고통과, 평생을 두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며 계속 미안해했던 김영덕 감독의 회한이 공존했었죠.
'프로화는 되었지만, 현장은 야만에 가까웠던' 80년대 초반의 시대적 배경은, 성공하겠다는 일념 아래 비인간적인 대우를 묵묵히 받아들이게 했던 구조적 이유였습니다. 피해자인 박철순은 달관한 듯 행동했지만, 동시에 연대 후배 최동원 선수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야만의 그림자라는 모순되는 이력을 가지고 있었죠.
김영덕 감독의 리더십은 '불합리성에 대한 투쟁'에서 시작되었는데요. 일본 난카이 호크스 시절, 그리 나쁘지 않은 방어율과 실력을 보여주고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경험은, 그의 시스템을 객관적인 데이터와 냉철한 효율성만이 승리를 담보한다는 결과 지상주의로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침 호크스의 선발진은 완투형 투수들로 채워져 있었고, 주로 중간 계투로 등판한 김영덕 감독에게는 기회가 많이 돌아오지 않았죠.
서른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한국으로 돌아와 감독 겸 선수로 성공해야 했던 '시간의 압박'은 그의 시스템에 '단기 성과 극대화'라는 긴급성을 부여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실업 야구를 평정하다시피 했으며, 아직도 프로야구 1군 기록에는 없는 퍼펙트게임을 사상 두 번째로 달성하며, 한 차원 다른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게다가 실업 야구에서는 감독 겸 선수로 뛰면서 투타겸업이라는 흔치 않은 활약을 보였는데요.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 중 하나인 오타니 쇼헤이의 이도류를 이미 50년 전에 선보인 셈입니다. (KBO에서는 한화의 정민철 투수가 퍼펙트게임에 가장 근접했지만, 통한의 포일로 노히트 노런으로 만족해야 했죠)
(원년 6개 구단의 감독님들 사진입니다)
1982년 OB 베어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김영덕 감독은 하위권 전력으로 원년 우승이라는 단기적 비즈니스 미션을 달성해야 했습니다. 실업야구에서 프로화가 되면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을 테고, 원년 6개 구단 중에서는 베어스가 가장 먼저 창단식을 치르며 시즌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죠.
그리고 비록 어른의 사정으로 충청도 연고로 시작했지만, 3년 후에는 두산의 의지대로 서울로 돌아오게끔 되었는데요. 프로야구 첫 드래프트에서 엠비시가 김재박 등 두 명의 서울 연고 선수를, 베어스는 1명의 서울 연고 선수를 지명했고 그 선수가 바로 박철순이었습니다.
이윽고 코치진 조각을 완성 헸는데요, 코치진의 면면이 놀랍습니다. 바로 김성근 신일고 감독과 이광환 중앙고 감독이었는데요. 이 두 분이 훗날 KBO에 남긴 발자취를 생각하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네요. 김영덕 감독님의 코칭 스타일은 여러 증언으로 남아 있는데요. 굉장히 혹독한 훈련과 함께 선수들 뿐만 아니라 코치를 비롯한 선수단 전체를 하나로 뭉치게 하려는 카리스마가 강한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업야구시절 남긴 성적을 통해 이미 강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었죠.
시즌이 시작될 무렵, OB 베어스의 시즌 성적 예상은 잘해봐야 중위권이었습니다. 비록 박철순이라는 에이스와 윤동균, 김우열이라는 베테랑 타자가 뒤를 받쳤지만,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준다 해도 우승을 다툴 전력은 아니었죠. 이런 베어스를 두고 어떻게든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팀의 미래를 바라보는 운영보다는 당장의 성적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에이스 박철순의 어깨에는 더욱 무거운 짐이 놓였습니다.
(베어스 구단의 현재까지 유일한 영구결번, 불사조 박철순 투수입니다)
그 결과로 1982년 시즌 박철순의 기록은, 36게임에 등판(시즌 경기수가 총 80경기였으니, 투수가 시즌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경기에 등판했다는 뜻입니다) 1.84 방어율, 24승 4패 7세이브, 총 224.2 이닝 투구(놀라운 사실은 박철순이 최다 이닝을 던지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롯데의 노상수 투수가 총 47경기, 232.1 이닝을 던지며 최다 이닝 1위를 기록했습니다), 7세이브로 구원 3위, 2 완봉승을 포함한 15 완투로 리그 1위를 차지했는데요.
언뜻 보기엔 멋져 보일지 몰라도, 이는 정말로 야만적인 혹사로 읽히는 다시 나와서는 안될 기록들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 싶으면 선발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등판했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프로화되었지만 야만에 가까웠던 현장'에서, 김영덕 감독의 '전능한 통제' 시스템은 혼란을 극복하고 성과를 뽑아낼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였다는 점에는 공감합니다. 시스템은 규율과 통제가 부족했던 현장을 장악함으로써 극한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는 배경을 얻었고, 실제로 베어스는 전기리그 우승이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표를 받으며 주목받았고, 따라서 당시 김영덕 감독의 방법론을 비판하기는 힘들었죠.
시스템의 효율은 박철순이라는 핵심 자원에 대한 극단적인 '선택과 집중'으로 발현되었습니다. 김영덕 감독의 '짜내는 작전' 아래, 박철순은 22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짜내는 작전의 결과는, 이미 박철순 투수의 1982 시즌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아무리 건강한 운동선수라 할지라도, 거의 살인적인 이닝을 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야 했을지, 동정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는 시스템의 단기적 목표가 자원의 장기적 가치를 압도하며 치른 가장 비싼 대가였습니다. '대포 주사'를 맞고 등판해야 했던 박철순의 몸은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습니다. 시스템의 성공은 곧 핵심 인적 자원의 파괴와 등가 교환되었던 가장 냉혹한 비즈니스 공식이 완성된 순간이었습니다.
영상에서도 우승을 위해 불가피했던 당시를 회고하는 김영덕 감독님인데요. 사실 박철순 선수의 부상에는 물론 혹사가 가장 컸겠지만, 베어스의 후기 우승을 막기 위해 꼼수를 부렸던 KBO도 비판을 피해 갈 수는 없겠네요. 그때 허리 부상이 없었더라면 그의 투수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