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치수(治水)한 마지막 선비, 이해찬을 배웅하며

명분으로 물길을 열고, 조력으로 중흥을 설계한 거인의 뒷모습

by 동물의삽

1. 흑백 사진 속의 예언: 떡잎부터 달랐던 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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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낡은 중학교 졸업 사진이 있습니다. 삐딱하게 고개를 꺾고 세상을 쏘아보는 소년의 눈빛은 이미 박통 강점기의 야만을 예견한 듯 서늘했습니다. 그 눈빛은 훗날 민청학련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거대한 폭압 앞에서도 결코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남영동의 지하실에서 동지를 팔아 생존을 구걸하던 변절의 시대, 박종운, 김문수, 이재오 같은 이름들이 권력의 품에 안겨 과거를 부정할 때, 그는 고문으로 부서지는 육체를 명분 하나로 지탱하며 침묵했습니다. 그 숭고한 침묵은 훗날 21세기 대한민국의 가장 정교한 설계도가 되었습니다.



2. 지방자치의 물길을 열고 민심을 흐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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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곧 치수(治水)라는 고인의 철학은 1995년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시절부터 실체화되었습니다. 그는 관료 중심의 닫힌 행정을 깨고 시민 자치의 물길을 열었습니다. 중앙에 고여 썩어가던 권력을 지역과 시민에게 흘려보내기 위해 시스템의 기초를 다시 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지방자치의 권능은, 권력을 성벽 안에 가두지 않고 민심의 바닥까지 흐르게 하려 했던 그의 초기 설계에서 비롯된 소중한 결실입니다.



3. 21세기 지식 강국의 거대한 제방을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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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의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서 그는 '이해찬 세대'라는 조롱 섞인 비난의 파도를 홀로 맞섰습니다.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그의 선언은 단순히 입시 제도의 변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20세기형 암기 위주의 정체된 물길을 퍼내고, 21세기 AI 시대를 대비한 창의적 인재의 물길을 트는 거대한 제방 공사였습니다.


지식만 외운 껍데기들이 도태될 것을 수십 년 전에 예견한 그는, 비난을 땔감 삼아 대한민국의 체질을 바꾸었습니다. 그가 닦아놓은 능동적 대처의 DNA가 있었기에, 우리는 IMF라는 대홍수 속에서도 IT 강국이라는 새로운 물길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4. 책임 총리와 세종시: 국가 균형 발전이라는 대치수(大治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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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국무총리로서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책임 총리'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통령이 가치를 제시하면, 그는 방대한 데이터와 철저한 실무력으로 그 가치를 현실의 수로로 치환했습니다. 특히 국가 균형 발전의 상징인 세종특별자치시는 그의 치수 철학이 정점에 달한 성취였습니다.


수도권이라는 좁은 항아리에 갇혀 비대해진 권력과 자본의 물길을 전국토로 분산시키기 위해, 그는 기득권의 거센 저항을 뚫고 세종시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시 건설을 넘어, 대한민국의 국운을 사방으로 소통시키려 했던 거대한 역사(役事)였습니다.



5. 물길을 가두지 않은 리더십과 불패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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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민주당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7전 7승,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불패의 신화는 권력을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 정부의 물줄기가 멈추거나 오염되지 않도록, 그는 기꺼이 뒤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습니다.


주인공의 조명을 탐하지 않고 한 발 뒤에서 물길을 수호한 그의 절제는, 명분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선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정치가 권력을 가두는 보(洑)가 아니라, 민심을 바다로 인도하는 수로여야 한다는 믿음을 그는 단 한순간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6. 맺으며: 명분으로 빚은 거인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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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을 꺾은 수많은 변절자가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역사의 오물로 박제될 때, 그는 홀로 외로운 선구자가 되어 물길을 지켰습니다. 정치는 기술이 아니라 명분이며, 그것은 곧 백성을 먹여 살리는 치수라는 것을 그는 온 생애로 증명했습니다.


이제 그 삐딱했던 소년은 영면에 들었으나, 그가 파놓은 맑은 수로(水路)는 여전히 이 땅의 근간을 적시고 있습니다. 지식의 시대가 가고 지혜의 시대가 오는 길목에서, 우리는 비로소 고인이 남긴 주름의 깊이를 이해합니다. 명분을 지킨 자의 퇴장이 이토록 시리도록 아름다운 것은, 그가 온몸으로 지켜낸 물길이 이제 우리 모두가 유영할 수 있는 드넓은 바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가 남긴 꼿꼿한 절개를 가슴에 깊이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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