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에서 종로까지, 직접 발걸음을 디디며 바라본 2026년의 돈화문로
이번 글에서는 지상으로 목적지를 정한 저는, 4호선 방면 충무로역의 7번 출구로 나와서 돈화문로를 따라 옛 기억을 되살려보는 경로를 걷기로 했습니다.
을지로 3가 역 방향으로 향하며, 저는 오래전 잊혔던 건물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는데요, 바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리라는 뉴스가 나자, 전격적으로 건물주가 철거해 버린 스카라 극장의 이름이었습니다. 지금 그곳에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바로 코앞에서 목격하는 경험은 처음이기에 묘한 기분이었는데요.
이미 주인공이었던 건물은 사라지고, 근처 상가의 한 간판에 그 이름이 남아 있더군요. 아직도 그 이름을 떠올리게 해 준 간판에 고마움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예전 스카라 극장은 고풍스러운 세련된 외관으로 기억에 남아있던 곳이었는데요. 비록 바로 근처에 THX 사운드로 무장한 대규모 개봉관, 명보극장에 살짝 밀려 대작들을 상영하지는 못했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그 자리에는 처음 보는 건물이 들어서 있더군요.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왠지 모를 씁쓸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20대 시절 영화 소모임에서 활동할 때, 스카라 극장에서 시사회를 많이 했어서 찾아다닌 기억은 이제 다 사진 속으로만 남게 되었네요.
80년대 대한극장과 함께 서울의 가장 좋은 시설을 다투던 대형 개봉관, 명보극장의 현재 모습입니다. 00년대 지금의 모습으로 멀티플렉스로 거듭났는데요.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명보아트홀로 운영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친구'가 개봉했을 때 멀티플렉스로 거듭난 명보극장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80년대 단관시절 명보극장에서 지옥의 묵시록을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요. 명배우 로버트 듀발이 분한 킬고어 중령의 모습과, 그가 이끄는 헬기 부대가 평화로운 베트남의 마을을 공습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명보극장의 압도적인 사운드와 함께, 발키리의 기행이 흐르며 펼쳐지는 장면에 3층까지 꽉 들어찬 관객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영화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죠.
명보극장 사거리를 지나 을지로 3가 역을 끼고 살짝 예전 생각이 나서, 을지로 4가 방향으로 움직여 보았습니다. 살짝 먼 길이었지만, 과연 기억 속의 그곳이 어찌 변했을까 하는 궁금함이 컸는데요. 워낙 추운 날씨라서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숙소들이 밀집한 곳이라서 그런지 외국 관광객들의 대화 소리는 심심치 않게 들리더군요.
추억 속에서 고풍스러운 디자인으로 유명했던 국도극장은, 어린 시절 아놀드 슈워지네거 주지사가 출연하는 영화나, 90년대 개봉하여 홍콩 무협 영화를 현대에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은 '황비홍'을 본 기억으로 남아있는데요. 스카라 극장과 비슷하게 문화재로 지정되기 직전에 철거가 시작된 케이스입니다. 직접 예전 그 자리로 찾아가서 목격한 장면은...
한때 국도극장이었다는 사실은 '호텔 국도'라는 이름으로만 남아있었는데요. 르네상스 양식의 멋들어진 석조 양식 대신에 최신식 고층 호텔로 지어졌더군요. 로비에 들어가 볼까 했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을 것 같아 그대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다시 돈화문로로 돌아와 종로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는데요. 길을 걸으며 보이는 풍경들은 재개발로 블록 전체가 뒤덮인 모습들이었습니다. 20세기 시절만큼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아니고, 굳이 시내의 상가를 찾을 이유도 사라진 지금, 토지를 어떻게든 활용하겠다는 소유주들의 결정일테니 제가 의견을 보탤 수는 없는 일이죠.
예전에는 청계 고가가 지나가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청계천이 다시 흐르고 있는데요.
어두컴컴한 고가도로 아래로 온갖 공구 상가가 줄지어 있던 곳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멀리 동대문 방향으로 두산타워가 보이네요.
그렇게 걷다가 조금 충격적인 풍경을 마주했는데요.
혹시 이 자리가 무엇이 있던 자리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힌트를 하나 드린다면, 화면 살짝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종로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국일관 건물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는 마음으로 공사장 펜스에 가까이 가 보니, 이런 공고가 붙어 있더군요.
불행 중 다행으로 새로 지어질 건물의 용도는 영화관 등.으로 되어있으니 어떻게든 명맥은 유지할 것으로 짐작되나, 불과 얼마 전까지도 멀쩡히 있던 서울극장이 사라진 것을 보니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종로 3가로 발길을 돌려, 서울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대표적인 개봉관이었던 피카디리와 단성사 자리로 이동했습니다.
지금 한국 금 거래소라고 이름 붙은 건물이 원래 피카디리 극장 자리였고, 영화관은 지하의 CGV 피카디리 자리로 옮겨갔네요. 어렸을 때는 피카디리 극장 앞 광장이 꽤 넓었던 기억인데. 2026년의 광장은 노점들 때문인지 그때와는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맞은편에 위치한 단성사입니다.
재개발 이후 아주 잠시 단성사의 이름으로 영화관 운영을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다 사라지고 완전한 귀금속 상가가 되었네요. 연일 금값 은값이 폭등하고 폭락하고 이런 뉴스가 들리는 와중에, 그래도 이곳은 제법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요. 이곳에서 보았던 맨 인 블랙이나 다이하드를 비롯한 영화들이 살짝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더군요.
추억의 극장 자리를 지나 돈화문로의 끝으로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추억이 많았던 익선동 골목 초입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이곳을 아시는 분들은 아마도 바로 떠오르는 풍경일 텐데요. 날씨가 매우 추워서 손님들은 다들 안쪽에 계시는 통에 특유의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니 반가움이 더했습니다. 이제는 회식도 점심때 하고, 갈수록 밖에서 술을 마시는 일도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이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연탄불에 갈매기살을 구워 먹는 경험은 또 다른 추억으로 남겠죠.
한 시간 남짓을 천천히 걸어서 돈화문로 근처의 예전 추억의 건물과 장소들을 돌아봤습니다. 을지로3가에서 종로까지, 짧다면 짧은 이 길 위에는 20세기와 21세기가 불협화음인 듯하면서도 묘한 화음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는데요.
누군가에게는 매일 지나는 무심한 출근길이겠지만, 걸음 끝에 마주한 풍경은 단순한 도시의 파편이 아니었습니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예우와 새로 들어서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교차하는 이 길 위에서, 저는 여전히 그 시절의 흔적을 붙잡고 오늘의 기록을 이어가야겠죠.
결국 제가 걸어온 이 길은 과거를 기억하고 내일을 맞이하는 가장 정직한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발걸음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도 작은 쉼표 하나를 남길 수 있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율곡로를 따라 3호선 안국역을 지나 경복궁역에 이르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