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 랩소디(5): 서울 한 복판의 뭉클한 풍경들

안국에서 경복궁까지, 걸음으로 되새긴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 나들이

by 동물의삽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은 안국역~경복궁역에 이르는 풍경들을 렌즈에 담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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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길의 끝에 이르자, 창경궁 방향에서 오는 율곡로와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경복궁 방향으로 돌리니, 그곳에는 서울 우리 소리 박물관이 있더군요. 비록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다시 온 이곳에 특별한 장소가 생겨서 반가웠습니다.



굉장히 추운 날씨 통에 길바닥이 눈과 염화칼슘으로 가득했는데요. 조심스레 안국역 방면으로 발길을 돌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종로 3가 근처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율곡로는 한산한 편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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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룹의 계동 사옥을 오랜만에 마주쳤는데요. 아직 아산 정주영 회장이 살아있던 시절, 현대 가는 청운동과 가회동 등지에 모여 사는 것으로 유명했었죠. 항상 대가족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새벽같이 출근했다는 추억의 그 건물은, 이제 현대건설이 자리 잡고 있는데요. 변함없는 아치 모양의 창문은 한때 재계 1위였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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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역을 지나 예전 풍문 여고가 있던 곳에 도착하니,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는데요. 이미 풍문여고는 풍문고가 되어 자곡동으로 이사를 갔고, 남녀공학으로 시대에 맞춰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있던 교사는 서울공예 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되어 변함없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더군요.



공예 박물관 맞은편에는 원래 한진그룹이 소유했던 거대한 부지가 있었는데요. 지금은 모기업의 경영난에 서울시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고, 그 자리는 담장이 사라진 채 열린 송현녹지광장이란 이름으로 시민들을 위해 개방된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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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넓은 토지이고, 원래 한진그룹에서 사운을 걸고 7성급 특급 호텔을 지으려 했다는데요. 주변 풍문여고를 비롯한 덕성여중/고의 학교 보건법에 걸려서 고층 건물 건설은 난항을 겪었죠. 말하자면 지금은 공예 박물관이 된 풍문여고가 끝까지 시민들의 땅을 지킨 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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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살짝 덮인 인왕산의 모습이 시원한 광장 너머로 위엄 있게 펼쳐져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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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인 경복궁 근처까지 왔습니다. 제가 서있는 곳은 경복궁 주차장 맞은편, 그러니까 외국인들이 한복을 대여하는 상점이 줄줄이 늘어선 골목인데요. 산세가 멋져서 한 장 더 남겨 보았습니다. 이 추운 날씨에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들과 아이들이 볼이 빨개진 채로 까르르 웃고 있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네요.



저는 경복궁으로 들어가진 않고, 바로 경복궁 건너편에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새로운 전시 구경도 하고, 무엇보다도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될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였죠. 역사박물관의 8층 옥상 정원 뷰는 유명한데요. 경복궁과 청와대, 서촌까지도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풍광을 사진에 담을 수 있는 곳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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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청사와 광화문 사이로 펼쳐지는 옛 서울의 살아있는 마을, 서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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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줌을 당겨서 찍은 경복궁의 모습입니다. 이 추운 날씨에도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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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과 경복궁 정면 사진입니다. 너무 추워서 생각보다는 관광객이 많지 않더군요. 그렇지만 전시관 내에는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로 빼곡했습니다. 메인 전시 중의 하나인 20세기 밤풍경 테마 기획전은 아직 등화관제가 있었고 통행금지가 실시되던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나라의 생활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는데요. 아무래도 밤풍경 주제이다 보니 조명이 상당히 어둡고, 새까만 패딩을 입은 학생들이 워낙에 많다 보니 혹시 부딪히지 않도록 신경을 좀 써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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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형으로 핸들이 반대쪽에 달린 추억의 현대 포니 자동차를 갖다 놓았더군요. 너무 반가워서 한 장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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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는 90년대 학생들의 문화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해서, 김건모 신승훈 등 음반을 백만 장 단위로 팔아치웠던 거물 가수들의 앨범이 모인 사진을 한 장 남겼습니다. 저는 사진 속의 물건들에 대해서 뜻깊은 추억이 있지만, 학생들은 하나도 모르다 보니 부모님들이 신이 나서 설명을 해 주는 모습이 정겹더군요.




과거와 미래가 층층이 공존하는 이 길을 하루 종일 걷다 보니, 두 시간을 훌쩍 넘긴 여정에 발끝이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는데. 하지만 방구석에만 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소중한 장소들을 목격했습니다. 풍문여고의 생기 대신 정적인 아름다움이 들어선 공예박물관, 재벌의 욕망이 비워진 자리에 시민의 쉼터가 된 열린 송현녹지광장, 그리고 잊혀가는 삶의 흔적들을 박제해 둔 서울소리박물관까지. 직접 발을 내디뎌 확인한 이 풍경들은 발의 피로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뿌듯한 수확이었습니다.


경복궁역에서 다시 신사 방면 3호선 열차에 오르자, 부쩍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들의 낯선 언어들이 귓가를 스칩니다. 등화관제와 야간 통금이 일상이었던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이, 이제는 세계인이 제 발로 찾아오는 선진국이 되었음을 그들의 무심한 표정에서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데요. 그럴수록 우리는 지켜야 할 역사와 지향해야 할 미래를 확실히 다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다짐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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