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권하는 사회에서 '반편이' 황만근이 지키려 했던 것
성석제의 소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는 제목부터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황만근은 대체 뭐라고 말했는가?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그 답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답이 보이는 순간, 이 짧은 소설이 얼마나 서늘한 고발장인지도 함께 깨닫게 된다.
황만근은 말이 어눌하다. 그래서 늘 놀림받고, 이용당하고, 결국엔 소외된다. 반면 마을에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장도 있고, 뭔가를 기획하고 주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농촌의 문제를 입으로 해결하려 한다.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하고, 때로는 정부 지원을 받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땅을 지키고, 마을 일에 몸을 쓰고, 공동체를 실제로 떠받치고 있는 건 황만근이다. 작가는 이것을 대놓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황만근의 하루하루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그게 더 무섭다. 독자 스스로 깨닫게 만드니까. 농촌 문제는 머리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농촌을 살리겠다는 정책은 넘쳐나지만, 황만근 같은 사람이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든 적은 없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비로소 제목이 가리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농부는 빚을 지마 안 된다 카이."
황만근이 평생 지킨 원칙이자, 그가 남긴 거의 유일한 '선언'이다. 말 못 하는 사람이 평생을 두고 몸으로 증명해 온 한 문장. 작가는 소설의 제목을 이 한 마디로 수렴시킨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바로 이렇게.
그런데 이 말이 비극적인 이유는, 그 원칙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황만근이 결국 소멸하기 때문이다. 빚지지 않고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그 원칙이 지금의 농촌 현실에서는 지켜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작가는 그 사실을 분노하며 외치지 않는다. 그냥 황만근의 삶으로 조용히 보여준다. 그래서 더 가슴을 파고든다.
작가는 농촌 문제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통계도 없고, 주장도 없다. 대신 황만근 한 사람을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는 그 한 사람을 통해, 수십 년째 반복되는 농촌의 비극이 개인의 무능이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장 성실하고, 가장 공동체에 헌신한 사람이 가장 먼저 밀려나는 구조. 그것이 문제다.
지금도 어딘가에 황만근이 있을 것이다. 빚지지 않으려 버티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말이다.
소설이 나온 지 20여 년이 흘렀다. 그런데 농촌은 나아졌는가.
지금 농촌에는 스마트 농업이 있고, 귀농하는 청년들이 있고, 하우스 공법이 있다. 겉으로 보면 뭔가 달라진 것 같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부 빚이다. 스마트팜 설비도 대출, 귀농 창업 자금도 대출, 하우스 시설도 융자. 그리고 그 창구에는 어김없이 농협이 있다.
농협은 농민을 위한 조직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농협은 귀농을 희망처럼 포장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각종 사업을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빚과 함께 안겨준다. 황만근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원칙을 가장 조직적으로, 가장 체계적으로 무너뜨리는 곳이 바로 농협이다.
황만근 시대에는 그래도 공동체가 있었다. 품앗이가 있었고, 같이 버텨주는 이웃이 있었다. 지금은 그것마저 없다. 혼자 빚을 안고, 혼자 감당하다가, 혼자 무너진다. 성석제가 이 소설을 지금 쓴다면, 황만근은 아마 스마트팜 대출을 받고 폐업한 귀농인이 됐을 것이다.
농촌 문제는 이미 손댈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느끼는 건, 20년 전 작가가 이미 그 결말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제목을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짧은 제목 안에 작가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담았는지를 느끼게 된다. 황만근은 말을 잘 못했지만, 작가는 황만근의 입을 빌려 아주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농부는 빚을 지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농부가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