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골목의 향수와 붉은 밤의 위로
저는 지난 시간에 구룡반도 조던 근처에 있는 숙소를 권해드렸는데요. 오늘은 조던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홍콩 사람들의 실제생활 속으로 한걸음 다가서서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곳, 삼수이포를 나들이 코스의 시작으로 정했습니다. 명품 거리와 현대적인 빌딩이 즐비한 조던에서 삼수이포로 향하는 길,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먼저 숙소 근처의 MTR을 타고 삼수이포 역에서 내리는 방법, 두 번째는 이층 버스를 타는 방법, 세 번째는 빨간 택시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죠. 그리고 평범한 관광객들은 쉽게 도전하기 힘든 방법이 하나 더 있는데요. 그건 바로 씨우빠에 도전하는 겁니다.
한번 지하철 대신 홍콩 사람들의 진짜 발이 되어주는 '씨우빠(미니버스)'에 몸을 실어보는 경험은 어떨까요? 조던 역 근처 골목에서 빨간 지붕의 미니버스를 타는 것부터가 진짜 여행의 시작입니다. 좁은 시트와 빠른 속도감, 그리고 내릴 때가 되면 기사님께 크게 외쳐야 하는 "록체아(落車, 내릴게요)!"라는 말 한마디. 생활 현장의 소통 속에 섞여 내린 삼수이포의 첫인상은 '삶의 밀도' 그 자체였습니다.
홍콩 영화 속에서 많이들 목격하셨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낡은 저층 건물들 사이로 빼곡하게 걸린 빨래 건조대들이 보이는데요. 그리고 그 아래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톱니바퀴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 장치처럼 무질서한 듯 하면서도 홍콩만의 특별한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전자기기의 성지라 불리는 '황금전자상가(웡깜셩청:Golden Computer Arcade)'인데요. 낡은 외관과는 달리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늘할 정도의 강력한 냉방이 가장 먼저 반겨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기묘하고도 반가운 통일감 하나. 층마다 카테고리는 다르지만, 수많은 노트북과 TV, 모니터 화면들이 일제히 케이팝 뮤직비디오를 틀어놓고 있었다는 점이죠. 낡고 눅진한 삼수이포의 던전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세련된 한국의 비트는 무척 이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전자제품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습니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한 부품들을 저렴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은 물론, 현금 결제를 무기로 기분 좋은 흥정의 묘미도 누릴 수 있으니까요. 특히 지하 게임 매장은 보물 찾기의 명소입니다. 중고 타이틀 사이를 잘 살피다 보면 뜻밖의 득템이 가능하거든요. 특히 홍콩이나 아시아판 게임들은 의외로 한글 자막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아, 언어의 장벽 없이 저렴하게 게임을 즐기려는 실속파들에겐 놓칠 수 없는 포인트입니다.
삼수이포에서 멀지 않은 몽콕역에 내리는 순간 직감하게 되실 텐데요. 여긴 사람을 피하는 게 불가능한 초 번화가입니다. 이 거대한 인파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미리 짐부터 간소화하는 게 필수인데요. 백팩은 가슴 앞으로 돌려 메고 귀중품은 깊숙이 챙기는 것, 이게 바로 몽콕을 대하는 베테랑의 자세죠.
레이디스 마켓의 번잡함을 뚫고 소이 스트리트(Soy Street)로 접어들면, 코끝을 훅 찌르는 밥 태운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어디서 불났나?" 싶지만 그게 바로 홍콩의 맛, 보자이 판(솥밥) 냄새인데요. 탄내가 심해도 막상 들어가 한 끼 먹어보면 조리 때 나는 냄새지 밥 자체는 전혀 탄내도 안 나고 가성비도 좋고 우리 입맛에도 딱이거든요.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운데, 오래지 않아 테이블로 오는 지글지글 끓고 있는 솥밥은 비주얼도 대단한데요. 한국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솥밥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일부러 밥을 뒤섞지 않고 바닥에 살짝 눌은 부분을 살짝 간장을 뿌려서 긁어 먹는 맛이죠. 좁은 식당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 부딪히며 먹는 경험은 꽤 특별하게 다가오실 겁니다.
소이 스트리트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사 이 스트리트(Sai Yee Street)의 작은 공원을 지나게 됩니다. 규모는 작지만 공중화장실이 있어 늘 사람들로 붐비고, 근처엔 씨우빠(미니버스) 기사님들이 잠시 차를 세우고 쉬고 계시는 몽콕의 민낯 같은 곳이죠. 이 공원을 지나면 드디어 운동화 거리인 화원가입니다.
사실 환율 생각하면 면세라도 예전처럼 싸지는 않아요. 하지만 한국에 없는 레어템을 발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뜻밖의 횡재를 잡을 수도 있는 행운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여름이나 겨울 세일 기간에 간다면 뜻밖의 득템도 가능한데요. 세일이 시작되는 때에 간다면 할인폭은 작지만 물건이 많고, 끝나가는 기간에 간다면 할인폭은 최대지만 쓸만한 물건을 찾기가 힘든 것은, 홍콩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옆 여인가(레이디스 마켓)는 이름만 야시장이지 낮에도 훤히 열려 있어요. 오히려 저녁보다 한산해서 둘러보기엔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이국적인 기념품 정도 사는 건 좋지만, 전자제품이나 시계 같은 건 웬만하면 참으시는 걸 추천해요. 아, 발이 좀 괜찮다면 근처 금붕어 거리도 살짝 구경해 보세요. 비닐봉지에 담긴 금붕어들이 벽면 가득한 게 꽤 묘한 볼거리입니다.
홍콩섬부터 구룡반도까지 3박 4일쯤 지내다 보면 슬슬 한식이 그리워지기 마련이죠. 조던역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한국 식당이 몰려 있는 킴벌리 로드나 프랫 가가 나옵니다. 특히 미라마 쇼핑 안에 있는 '서라벌' 같은 곳은 10년 넘게 버틴 터줏대감이라 정말 반가운 맛일 거예요. 쾌적하게 식사하고 나와서 구룡공원 아케이드나 카메론 로드, 모디 로드를 걷다 보면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드실 겁니다.
한국 식당에서는 익숙한 한식 찌개류나 불고기, 삼겹살은 물론 분식류도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국내 가격을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것이, 엄연히 홍콩에 있는 한국식 레스토랑이기 때문입니다. 김치찌개 한상에 hkd 100 정도 받는 것은 기본일 경우가 많고, 당연히 소주도 팔지만, hkd 70이라는 높은 가격이니 적당히 알아서 즐기시는 걸 추천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식 패스트푸드라고 해서 분식집도 있는데, 거기서 짜장면과 짬뽕도 팝니다. 짬뽕은 해산물이 풍부한 홍콩이라 우리나라의 맛 못지않지만, 이상하게 짜장면은 그 맛이 나지 않더군요.
침사초이 중심가는 어느 곳을 가도 쇼핑센터가 밀집해 있는데요. 만약 몽콕 화원가를 지나치셨다면, 침사초이 한복판의 카메론 로드에도 몽콕 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스니커 골목이 있으니 한번 구경하시는 것도 좋겠네요.
마지막은 미라마 쇼핑 옆 골목으로 이어지는 넛츠포드 테라스입니다. '리틀 란콰이퐁'이라 불릴 만큼 이국적이고 여기저기서 전 세계 언어가 들리는 재미있는 곳이죠. 밤이 되면 관광객들과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삼삼 오오 모여서 하루의 피로를 풀며 맛있는 안주에 맥주를 한잔 하는 펍이 밀집해 있는데요.
유명한 펍의 경우 안쪽에 조그만 무대를 마련해 두고, 피크 타임에는 공연을 보여주는 곳도 있는데. 주로 필리핀 밴드가 연주하는 스탠더드 팝을 들을 수 있는데요. 생각보다 엄청난 실력에 놀란 적도 많습니다.
침사추이의 네온사인과 넛츠포드 테라스의 선율은 구룡반도라는 밀도 높은 챕터의 화려한 마침표였는데요. 지글거리는 포 짜이 판(Hong Kong-style Clay Pot Rice) 한 그릇에 담긴 홍콩의 소울을 뒤로하고, 이제 중심부를 벗어나 좀 더 자연에 가까운 곳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이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확장의 시작인데요. 홍콩의 숨은 저력을 품은 신계 지역의 광활한 풍경은 물론, 동양의 라스베이거스 마카오와 '아시아의 실리콘밸리' 심천이 그려낼 거대한 삼각지대의 이야기가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룡을 넘어 대륙의 끝자락까지 이어질 이 압도적인 여정의 다음 페이지에서, 우리는 더욱 선명하고 깊어진 홍콩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