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이야기(19): 홍콩의 재벌, 뉴 월드 그룹

황금의 신뢰로 세운 제국: 정유동과 주대복, 그리고 뉴 월드의 자본학

by 동물의삽


홍콩 자본주의 역사에서 정유동(鄭裕彤) 회장은 '신뢰의 자본화'를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인물로 평가받는데요. 1940년대 장인 주지원이 세운 작은 금은방 주대복(Chow Tai Fook)의 점원으로 시작한 그는, 당시 가짜 금이 횡행하던 시장의 불신을 뚫고 '999.9 순금 보증'이라는 파격적인 표준을 제시했습니다.


Cheng-Yu-Tung-e1416488757145.jpg 금과 땅이라는 양수겸장을 두른 대부호, 정유동 회장

"주대복의 금은 곧 현금이다"라는 시장의 믿음은 거대한 현금 흐름을 창출했는데요. 그는 이 자본을 바탕으로 명덕 은행 파산과 '67 폭동의 여파로 부호들이 줄줄이 땅을 팔고 홍콩을 떠나자, 1960년대 홍콩 부동산 폭락기에 저평가된 토지를 공격적으로 매집하며 '상어(Shark)'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상어라는 별명처럼 과감한 베팅으로도 유명했던 정유동 회장은, 재미있게도 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관련한 일화도 있는데요. 1990년대 초, 트럼프가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정유동(주대복)과 나서홍(리버사이드 남부 개발) 등 홍콩 재벌들이 그의 뉴욕 부지를 인수하며 그를 살려줬습니다. 당시 트럼프는 자존심 다 버리고 홍콩까지 날아가 그들과 골프를 쳐야 했죠.


4KKKQED_BeFunky_collage_2_jpg.jpg 뜻밖의 인연(?)이 있었던 정 회장과 트럼프 대통령

골프 경기에서, 정유동 회장은 트럼프에게 한 판당 100만 달러가 넘는 판돈의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트럼프가 당황하자 홍콩 재벌들은 "미국 부자들은 배짱이 이것뿐이냐"며 웃어넘겼죠. 트럼프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협상가들"이라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나중에 부동산 경기가 좋아지자 홍콩 재벌들이 트럼프의 부지를 비싼 값에 처분했는데요 트럼프는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는데 내 허락 없이 싸게 팔았다"며 은인들을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트럼프의 완패였죠. 이때부터 그는 "중국인들이 미국을 등쳐먹는다"는 식의 적대감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v2_495a41bdbc2840e996a1906ecf33554e@000000_oswg111160oswg1080oswg544_img_000.jpg 예전 뉴 월드 센터 자리에 새로 개관한 k-11

금에서 확보한 유동성은 뉴 월드 개발 <New World Development>을 통해 거대한 부동산 제국으로 변모했는데요. 현재 자산 규모가 약 6,000억 홍콩 달러(약 100조 원 이상)에 달하는 뉴 월드 그룹은 침사추이의 랜드마크인 K11 MUSEA, 홍콩 컨벤션 센터, 그리고 럭셔리의 정점인 로즈우드(Rosewood) 호텔 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5a15c72c7b66ba21e018a74bd7e4bde3e0d6cea-2000x1334.jpg 스타의 거리에 새 랜드마크로 부상한 로즈우드 홍콩

특히 최근에는 부동산에 예술과 문화를 결합한 '문화 리테일' 모델을 통해 자산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며, 단순한 건설사를 넘어 홍콩의 라이프스타일을 지배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죠.




정유동 회장이 고집한 999.9 순금의 신뢰 위에 우아함의 정점을 찍은 것은 홍콩의 영원한 뮤즈, 진혜림(Kelly Chen)이었습니다. 주대복은 그녀를 단순한 광고 모델을 넘어 브랜드의 영혼을 대변하는 ‘천상의 뮤즈(Celestial Muse)’로 내세우며, 전통적인 금방의 이미지를 단숨에 하이 주얼리 하우스로 격상시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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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혜림이 뿜어내는 고결하고 세련된 아우라는 주대복의 황금빛 자산에 신성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이는 훗날 그녀가 샌프란시스코 체이스 센터(Chase Center)의 개관 공연을 장식하는 최초의 아시아 아티스트로 선정될 만큼, 글로벌한 상징성을 획득하는 발판이 되었죠. 결과적으로 주대복은 진혜림이라는 아이콘을 통해 국경과 세대를 초월하는 ‘에테르 브랜딩(Ethereal Branding)’을 성공시키며, 자본의 순도에 미학적 품격을 더하는 독보적인 전략을 완성했습니다.




chow-tai-fook-store-hong-kong-hong-kong-china-march-people-walk-chow-tai-fook-store-tsim-sha-tsui-chow-tai-fook-148348938.jpg 홍콩의 거리를 걷다 보면 50미터마다 보이는 간판입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큰 건물 마다 하나씩은 있죠

대중에게는 화려한 주얼리 브랜드로 친숙하지만, 정 씨 가문의 진정한 권력은 비상장 지주사인 주대복 엔터프라이즈(CTFE)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가문 전체 자산 약 290억 달러(한화 약 40조 원 이상)를 관리하는 거대 자본의 사령탑으로서, 상장사인 주대복 주얼리와 뉴 월드 개발의 최대 주주 지위를 유지하며 매년 조 단위의 현금 배당을 흡수하고 있는 실체죠.


공시 의무가 적은 비상장 구조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전 세계 금융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군림하는 이들의 실체는, 금방 사위에서 시작된 자본이 어떻게 국가급 인프라 자산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영학적 경이로움을 선사합니다.



vie-magazine-the-carlyle-new-york-rosewood-hotel-2-min.jpg 미드 '섹스 앤 더 시티' 등에도 자주 등장하면서 전 세계적 명소가 된 더 칼라일입니다

정유동 회장의 손녀 정지분(Sonia Cheng)이 이끄는 호텔 부문은 단순한 숙박업을 넘어, 주대복이 구축한 ‘여신 브랜딩’을 물리적 공간으로 구현한 결과물인데요. 2011년 미국 럭셔리 브랜드 로즈우드를 인수한 후, 홍콩 하버사이드의 랜드마크인 로즈우드 홍콩과 뉴욕의 전설적인 더 카라일(The Carlyle) 등 전 세계 30개국 40여 개의 초호화 포트폴리오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고액 자산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점유함으로써 자본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고도의 플랫폼 전략이며, 주대복의 순금이 지닌 상징성을 전 세계 VVIP들의 일상 속으로 침투시킨 결정적인 한 수였습니다.



Highres-2-Large.jpeg 오스트레일리아 퀸즈 워프의 위용

주대복의 자본력은 부동산과 호텔을 넘어 전 세계 유흥과 도박의 중심지로 뻗어 있는데요. 일찍이 마카오 카지노의 대부 스탠리 호와 손잡고 SJM 홀딩스의 주요 지분을 확보하며 동양의 라스베이거스를 지배해 온 이들은, 이제 호주 브리즈번의 퀸즈 워프(Queen's Wharf) 프로젝트에 약 3조 원을 투입하고, 카리브해 최대 리조트인 바하마의 바하 마(Baha Mar)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경기 변동에 구애받지 않는 막대한 현금 창출력을 지닌 카지노 사업은, 주대복 제국을 지탱하는 차가운 자본의 얼굴이며, ‘순금의 정직함’ 뒤에 숨겨진 거대한 도박 자본의 냉철한 계산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정유동 회장 사후, 제국은 장남 정가순(Henry Cheng)회장을 거쳐 3대 세습의 기로에 서 있는데요. 당초 후계 1순위로 꼽히던 정지강(Adrian Cheng) 전 부회장은 문화적 감각으로 그룹의 이미지를 혁신했으나, 최근 뉴 월드 개발의 부채 문제와 실적 악화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Rosewood-Hotels-wants-out-of-Baha-Mar.jpg 바하마의 바하 마 리조트

현재는 로즈우드 호텔을 성공시킨 여동생 정지분(Sonia Cheng)을 비롯한 형제들에게 권력이 분산되는 양상을 보이며, 100조 제국의 인감을 누가 최종적으로 거머쥘지 전 세계 자본 시장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정유동 회장은 자본의 축적만큼이나 그 결실을 사회로 되돌리는 ‘환원’의 가치를 엄격히 실천한 경영자였는데요. 그는 생전 교육과 의료 분야에 수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하며 홍콩과 중국 본토의 인재 양성에 앞장섰습니다.

cyt.jpg 홍콩 중문대에 세워진 정유동 빌딩, 이런 방식으로 영구적인 명예를 남겼습니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딴 정유동 재단(Cheng Yu Tung Foundation)을 통해 홍콩대학교, 홍콩중문대학교, 그리고 모교인 순덕의 학교들에 도서관과 연구동을 건립하는 등 교육 인프라 구축에 헌신했는데요. 이는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이며, 금은방 사위에서 시작해 세계적 거상이 된 그가 후대에게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은 화려한 건물이 아닌, 그곳에서 배출될 수많은 ‘미래의 인재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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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華僑)들이 전란의 포화 속에서 정든 고향을 떠날 때, 괴나리봇짐 속에 마지막까지 챙겼던 세 가지는 ‘금(金)과 칼(刀), 그리고 웍(鑊)’이었다고 하는데요. 어디서든 통용되는 자본인 금, 생존을 일궈낼 기술인 칼, 그리고 낯선 땅에서도 가족을 먹여 살릴 생명력인 웍은, 그들에게 단순한 도구가 아닌 생존 문법이었습니다.


정유동 회장은 이 고전적인 화교의 철학을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서사로 치환한 인물이었는데요. 그는 가장 정직한 순금으로 신뢰라는 자본을 쌓았고, 그 자본을 칼날 같은 예리함으로 부동산이라는 부동(不動)의 자산에 투입했으며, 전 세계에 뻗어 나간 호텔과 카지노라는 거대한 웍 속에 무한한 부를 담아냈습니다.


이제 그의 후손들이 뉴욕의 더 칼라일과 글로벌 로즈우드 제국을 누비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가 세운 기업의 이름인 ‘신세계(New World, 新世界)’가 단순한 야망이 아닌, 시대를 앞서간 거상의 장엄한 혜안(insight)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금과 칼, 웍 하나로 시작해 결국 전 세계의 표준을 재정의한 그의 이름 속에는, 새로운 땅에서 기어이 제국을 일궈낸 화교 자본의 생존 유전자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덕분일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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