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이야기(20): 통 큰 회장님, 이조기와 헨더슨

돈을 버는 기술과 쓰는 예술: 이조기와 헨더슨 제국

by 동물의삽

1. 격동의 홍콩, 1,000달러의 승부수


부푼 꿈을 안고 광둥성 순더를 떠나 홍콩으로 건너온 이조기(Lee Shau-kee) 회장의 수중에 남은 것은 단돈 1,000 홍콩달러뿐이었는데요. 그는 낯선 땅에서 금 거래와 환전업에 뛰어들어 특유의 성실함으로 종잣돈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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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홍콩은 1960년대 문화 대혁명의 여파와 급진좌파들의 폭동으로 인해 언론인이 차 안에서 테러를 당해 불타 죽을 정도로 사회적 혼란과 공포가 극심하던 참혹한 시기였는데요. 하지만 이조기 회장은 모두가 공포에 질려 홍콩을 떠날 때, 오히려 홍콩의 땅이 가진 미래 가치에 주목하며 헨더슨 부동산(Henderson Land evelopment)을 설립하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조기 회장이 사모은 땅들은 지금껏 헨더슨 그룹의 부의 원천이 되고 있죠.



2. 타운가스, 마르지 않는 독점의 금고


이조기 회장의 천재성은 1975년 홍콩 앤 차이나 가스(타운가스)를 인수하며 절정에 달했는데요. 그는 홍콩의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에너지 독점 사업이 가져다줄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Photo-1-相片一.jpg 신계지 타이포의 타운가스 플랜트입니다

오늘날 타운가스는 홍콩 가스 공급 시장의 약 85% 이상을 점유하는 사실상 독점 사업자로서, 매년 수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영업이익을 헨더슨에 안겨주고 있는데요. 부동산 경기가 출렁여도 홍콩 시민들이 가스레인지를 켜는 매 순간 헨더슨의 금고에는 현금이 쌓이는, 그야말로 무너지지 않는 요새를 구축한 셈입니다.


다음에 소개할 이가성 회장의 홍콩 전력과 마찬가지로, 홍콩인들의 생활을 좌지우지하는 가스를 지배하는 헨더슨의 타운가스는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라 할 텐데요. 더불어 센트럴 홍콩역 주변의 수많은 토지의 소유자도 헨더슨 그룹이므로, 우스갯소리로 홍콩섬에서 이조기 회장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3. 세기의 라이벌, 그리고 헨더슨의 랜드마크


Website_ifc-photo-3-scaled.jpg 홍콩섬 북부와 침사초이 어디서든 보이는 1 IFC

이러한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이조기 회장은 이가성(리자청) 회장과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홍콩의 스카이라인을 재편했는데요. 특히 1990년대 초, 두 거물은 홍콩의 운명을 바꿀 ‘IFC(국제금융센터) 부지 낙찰’을 두고 격돌하였으며, 결국 이조기 회장의 헨더슨 연합군이 승리하며 현재 홍콩의 상징인 IFC 빌딩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TheHaddon_600x900.jpg 헨더슨의 고오급 단지 조감도

그는 낡은 건물을 현대적인 주거 단지로 탈바꿈시키는 전략을 통해, 현대건설의 '힐스테이트'와 비견되는 프리미엄 브랜드 ‘더 헨더슨(The Henderson)’을 탄생시키며 부의 제국을 완성했습니다. 홍콩 시민들은 단지의 이름만 들어도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 알수 있을 정도죠.



4. 돈을 버는 기술, 그리고 쓰는 예술


이조기 회장은 평소 “돈을 버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 번 돈을 잘 쓰는 데는 예술적 감각이 필요하다”는 경영 철학을 강조해 왔습니다. 작은 돈을 소홀히 하지 않는 철저함으로 부를 일궜지만, 동시에 항셍지수가 목표치에 도달할 때마다 매년 10억 홍콩달러 이상을 사회에 기부하는 등 숫자를 넘어선 가치를 지향했습니다.


EvKbr2pVgAcbOCj.jpg 이조기 회장과 두 아들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사업 부문을 명확히 나누어 주며 실현한 평화로운 경영권 이양은, 형제간 분쟁이 잦은 여타 재벌가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10억 홍콩달러는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해서 1,800억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인데요. 매년 항생지수가 3만 포인트를 넘을 경우 기부하겠다는 방침을 세웠고, 약속을 지켰습니다. 비록 타운가스를 비롯한 이익이 천문학적이긴 하지만, 세계 유수의 재벌이 이 정도 규모의 기부를 약속하고 또 지키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물죠.



5. 분쟁을 넘어선 평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완성


academics.png 아시아의 세계적인 대학교 홍콩 과기대의 메인 빌딩인 이조기 경영관

이조기 회장의 영향력은 이제 경제를 넘어 홍콩의 지성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홍콩대부터 홍콩과기대까지 거의 모든 주요 대학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가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일을 가장 가치 있는 투자로 보았기 때문이죠. 홍콩 과기대에 이조기 회장이 출연한 기부금만 4억 홍콩달러, 우리나라 가치로 환산하면 700억원이 넘는 규모입니다.


결국 헨더슨 그룹이 존경받는 기업으로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타운가스의 독점 수입이라는 수치보다, 이조기 회장이 몸소 증명한 평화로운 승계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가치에 있습니다. 재무제표 너머의 기운을 읽을 줄 아는 이들에게, 이조기의 서사는 부의 획득보다 그 '끝맺음'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교본이 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왕족과 귀족들은 전시에 자신의 아들들부터 입대시키는 것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고 하는데요. 그 증거로 영국의 사립학교인 이튼 칼리지의 벽에는 수많은 전사자들의 명단이 남아있습니다. 홍콩의 재벌들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남기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요. 이런 점은 본받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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