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의 숫자 너머, '사람'이라는 가장 확실한 투자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이 어디냐는 질문에, 야구팬이라면 주저 없이 ‘제국’ 뉴욕 양키스의 이름을 떠올릴 텐데요. 하지만 그 화려한 핀스트라이프의 그늘에 가려진, 두 번째로 많이 우승한 팀을 물으면 대답은 조금 신중해집니다. 어찌 보면 숨겨진 진정한 강자일수 있기에 말이죠.
다저스나 자이언츠, 레드삭스 같은 인기 구단들의 이름이 오가겠지만, 사실 그 주인공은 11번이나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인데요.
뉴욕처럼 화려하지도, 보스턴처럼 요란하지도 않은 이 중부의 강호를 ‘지속 가능한 승리의 왕국’으로 탈바꿈시킨 인물, 그가 바로 설계자 월트 조케티(Walt Jocketty) 단장입니다.
조케티의 이러한 집요한 설계 철학은 그의 커리어 시작점인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키스의 창단 스태프로서 구단 운영의 기틀을 닦았던 그는, 그곳에서 ‘쿠어스 필드’라는 양날의 검과 사투를 벌이며 뼈아픈 교훈을 얻었는데요. 아무리 막강한 타선을 구축해도 투수진이 버텨내지 못하면 성적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잔인한 현실을 목격한 것입니다.
당시 로키스는 타격의 힘으로 와일드카드를 거머쥐기도 했지만, 정작 포스트시즌에 돌입하면 소진된 투수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무너지기 일쑤였죠 결국 월드시리즈라는 정점을 찍기 위해서는 화려한 방망이가 아닌, 마운드의 높이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조케티는 몸소 체득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 입성한 조케티가 무엇보다 ‘투수력 강화’에 사활을 걸었던 것은, 고산 지대에서 겪었던 그 처절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설계자로서의 결연한 의지였겠네요.
조케티는 자신의 철학을 현장에서 구현할 적임자로 토니 라 루사 감독을 점찍었습니다. 불같은 성미와 확고한 자기 철학을 지닌 용장 라 루사 역시 조케티가 내민 손을 허투루 잡지 않았죠.
라루사는 훗날 카디널스에 입단하며 “나는 조케티 단장에게 선택당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혁신적인 야구관을 온전히 지지하고 뒷받침해 줄 유일한 설계자가 조케티임을 알아본 거물들 사이의 ‘전략적 동맹’이었던 셈이네요.
이들의 성공 중심에는 이른바 ‘삼위일체’라 불리는 견고한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설계자 조케티 단장과 현장의 사령관 토니 라 루사 감독, 그리고 투수 조련의 명장 데이브 던컨 코치가 그 주인공인데요.
조케티는 라 루사 감독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그가 원하는 팀을 만들어 주었고, 라 루사는 ‘투수 분업화’라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현장에 안착시켰습니다. 훗날 한국 야구의 이광환 감독이 배워오기도 했던 이 ‘라루사이즘’은 현대 야구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케티의 설계는 당대 메이저리그를 양분했던 또 다른 명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성공 방정식과 비견되곤 하는데요. 애틀랜타에는 존 슈어홀츠(단장) - 바비 콕스(감독) - 레오 마조니(투수코치)로 이어지는 난공불락의 삼각동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14년 연속 지구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금자탑을 쌓으며 ‘투수 왕국’의 정석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세인트루이스의 조케티-라 루사-던컨 라인은 애틀랜타와는 결이 다른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그 차이는 두 거물 투수코치의 철학에서 극명하게 갈리는데요. 애틀랜타의 레오 마조니가 ‘육성형’의 정점이었다면, 세인트루이스의 데이브 던컨은 ‘재생형’의 마법사였습니다.
마조니 코치가 매덕스, 글래빈, 스몰츠 같은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원석들을 정교하게 관리하며 롱런 시키는 데 탁월했다면, 던컨 코치는 시장에서 소외된 베테랑이나 부상으로 날개가 꺾인 투수들을 데려와 그들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리모델링’에 주력했는데요. 방식은 달랐지만, 두 팀 모두 현장과 프런트가 서로의 전문성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신뢰하는 완벽한 리더십을 구축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라 루사 감독과 던컨 코치의 협업은 가히 연금술에 가까웠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무리 투수 제이슨 이스링하우젠입니다. 연이은 부상으로 구속이 형편없이 줄어버린 그를 향해 모두가 회의적인 시선을 보낼 때, 조케티 단장은 라 루사-던컨 시스템의 힘을 믿고 그를 영입했습니다.
던컨 코치의 조련 아래 이스링하우젠은 잃어버린 구속 대신 정교한 변형 패스트볼을 장착했고, 보란 듯이 부활하며 카디널스 역사상 최다 세이브라는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커리어의 마지막에는 결국 300세이브를 달성했죠. 비록 밀워키에서 달성했지만 말입니다.
조케티의 설계도가 오직 차가운 숫자와 전략으로만 채워졌던 것은 아닌데요. 1997년 마크 맥과이어를 영입할 당시, 조케티는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가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호텔로 가는 길 내내 그는 야구 통계 대신 ‘이 도시가 당신 가족에게 얼마나 따뜻한 안식처가 될지’를 진심으로 설득하며 선수의 마음을 샀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유대는 선수들에게 성적 이상의 보답으로 돌아왔습니다. 특히 이스링하우젠은 조케티와 던컨이 보내준 절대적인 신뢰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 믿음에 응답하듯 멋지게 부활하며 카디널스의 뒷문을 튼튼히 잠갔는데요. 한때 퇴물 취급을 받던 선수가 조케티의 품 안에서 믿음을 주는 투수로 거듭난 것입니다.
또한 2006년 우승 직후에는 모든 선수에게 맞춤형 정장과 구두를 선물하며 “경기장 밖에서도 챔피언답게 당당하라”는 격려를 잊지 않았는데요. 이러한 세심한 배려는 조케티라는 설계자가 ‘사람’이라는 가장 중요한 재료를 얼마나 소중히 다루었는지 보여줍니다.
조케티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의 퇴장에서 더욱 빛나는데요. 그는 두 번의 우승 트로피뿐만 아니라, 후임자인 존 모즐리액 단장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물려주었습니다. 비록 모즐리액은 세이버매트릭스를 중시하는 신세대 단장이지만, 조케티가 닦아놓은 단단한 기틀 위에 데이터라는 정교함을 얹어 훌륭하게 팀을 이끌고 있습니다.
과거의 유산이 미래의 혁신과 충돌하지 않고 계승되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조케티가 남긴 가장 완벽한 설계도가 아닐까 싶은데요. 진정한 거장은 자신이 떠난 뒤에도 왕국이 건재하도록 시스템을 남기는 법입니다. 월트 조케티가 만든 홍관조들의 왕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기는 법’을 잊지 않은 채 메이저리그의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