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와 사랑에 늦게 철드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주인공이 기억에 남는 게 아니라, 그 주인공과 불편하게 닮아 있던 나의 어느 시절이 기억에 남는다. 스티븐 프리어즈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 2000)가 그런 영화다. 닉 혼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존 쿠삭이 연기하는 롭 고든은 시카고에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서른다섯 살 남자다. 그는 음악에 관해서라면 박사 수준이지만,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거의 무지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롭의 가게 '챔피언십 바이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진열대마다 누군가의 취향과 고집이 빼곡히 쌓여 있고, 가게 한편에는 점원들이 직접 엄선한 리스트가 붙어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레이크업 송 Top 5"같은 식으로. 이 가게는 수익을 목표로 운영되는 곳이라기보다,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일종의 성지에 가깝다.
함께 일하는 딕과 배리 역시 정식 직원이라기보다는 한 식구에 가까운 존재들로, 이들이 나누는 음악 토론은 때로 손님보다 더 열정적이다. 롭은 이 공간에서만큼은 분명히 무언가의 주인이다. 하지만 그 확신이 정작 자신의 삶과 사랑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롭은 매력적이다. 탁월한 취향, 날카로운 위트, 진심 어린 감수성.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책임을 회피하고, 사랑을 관리하려 든다. 오래된 실연의 기억들을 꺼내 들고 "왜 나는 항상 버려지는가"를 자문하지만, 막상 그 질문의 답은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처를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캐릭터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선택지가 넘쳐나는 시대, 관계는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고, 진짜 취약해지는 일은 두려워진다. 롭이 연애를 대하는 방식 - 완벽한 사람을 찾는다는 명목 아래 정작 눈앞의 사람에게는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 것 - 은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어떤 남자들의 패턴이다. 연애 앱이 없던 2000년에도, 그것이 넘쳐나는 지금도 말이다.
그런 롭이 변하는 순간은 뜻밖에도 배리의 무대에서 온다. 사고뭉치에 독설가인 배리(잭 블랙)가 갑작스레 마빈 게이의 Let's Get It On을 부르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이 곡은 화려한 고백이 아니다. 오직 둘만 있는 세상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형태의 욕망이자 애정이다. 롭은 그 노래를 들으며 처음으로 자기 안을 제대로 들여다본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이미 곁에 두고도 얼마나 오래 외면해 왔는지를. 음악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다고 믿었던 남자가, 정작 음악이 전하는 가장 단순한 메시지를 가장 늦게 이해한 셈이다.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의 장면도, 통쾌한 자기 고백도 없다. 그저 삶이 그를 몰아붙이는 과정을 거친 후, 그는 조금 달라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그런 것이다. 화려한 전환점이 아니라, 작은 직면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조용한 변화를 깨닫는 순간이다.
롭이 마지막에 연인을 위해 음악을 준비하는 장면은 소박하다. 하지만 그 소박함 안에 이 영화 전체가 담겨 있다. 사랑은 리콜되지 않는다. 지나간 관계는 환불받을 수 없고, 상처는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천천히, 마지못해, 그러나 결국 변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