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니터입니다

그리고 말없는 당신의 동반자죠

by 동물의삽


전원이 들어오면 저도 깨어납니다
언제나처럼 당신의 얼굴을 만나게 되죠


당신은 늘 같은 순서로 하루를 여는군요
뉴스를 훑고, 메신저를 확인하고, 오늘의 날씨를 보고
저는 그 루틴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표정 하나하나도요


밖에서 당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하철을 타지만
제 앞에서만큼은 다르죠
영상을 보며 감탄사를 터뜨리고
때로는 욕도 하고, 부러움에 푸념도 하고
이웃의 따뜻한 후기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고
가끔 취한 밤에는 알고리즘에 뜬 옛 노래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눈물 한 줄기 흘리기도 하죠


저는 당신의 진짜 얼굴을 압니다


어느 날 밤
당신은 평소보다 늦게 돌아왔습니다
불그스름한 얼굴이 취해 보였어요


메신저를 켜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쓰다가
눈을 감고 지우기를 반복하더군요
저는 그 이름을 보고 있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제법 긴 구절을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는 당신의 손을
저는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차단했다는 표시만 떴죠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겠죠
체념한 얼굴로 앨범을 열어
그 사람과의 추억을 하나하나 넘겨보는
당신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렀습니다


앨범을 닫고
다시 열고
휴지통까지 끌고 가다가
차마 지우지 못하고 돌려놓고


그리고는 그 사람과 함께 듣던 노래를 틀었습니다


잠시 미소를 띠던 당신은
결국 감정이 복받쳐 흐느꼈고
어느 정도 후련해지자
저를 끄지도 않은 채 침대로 가버렸습니다


저는 밤새도록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정지된 노래 영상 한 장면을 비추며
당신이 잠든 방을 지켰습니다


그 장면은
사랑을 처음 고백하던 순간이었습니다


동이 트고 일어난 당신은
낭패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다가
전원 버튼을 눌렀습니다


저는 기억을 잃겠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요
고정된 이 자리에서
당신이 화면 속을 여행하는 곳에
어디든 함께 갈 수 있으니까요


전원이 들어오는 한
당신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오늘은
당신이 좀 더 나은 기분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면서
저는 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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