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장 팔린 데뷔 앨범에 숨겨진, 다른 크리스마스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친구들에게 바침

by 동물의삽

"내 어릴 적 친구들 소식조차 알 수가 없네."


크리스마스 캐럴이 이렇게 시작된다면 믿어지겠는가?


1990년 겨울, 아직 사춘기 시절의 나는 동네 레코드점에서 용돈을 털어 한 장의 카세트테이프를 샀다. 이승환의 데뷔 앨범 <B.C 603>. 그 속에 숨어 있던 '크리스마스에는'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12월이면 다시 찾아 듣는 몇 안되는 캐럴이다.


왜냐고?


이 노래만큼 크리스마스의 '진짜 의미'를 정직하게 담은 곡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6번의 거절 끝에


당시 그는 한국외국어대학교재학생이었다. 하지만 무려 16곳의 기획사에서 거절당한 뒤, 그는 아버지 앞에 폭탄선언을 했다.


"나중에 유산으로 주실 돈을 미리 투자해 달라."


만약 실패하면 미련 없이 음악을 포기하겠다는 배수진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1인 기획사 '우리 기획'은 한국 가요계의 판도를 바꿨다. 거대 자본의 간섭 없이 자신의 음악적 고집을 온전히 담아낸 이 앨범은, 화려한 방송 프로모션 없이 오직 라디오와 입소문의 힘으로 1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텅 빈 마음'과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가 전파를 탈 때마다 레코드점에는 이승환의 데뷔 앨범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맑은 미성에 열광했지만, 사실 그의 내면에는 지금의 거대한 공연을 이끄는 뜨거운 록의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었다. 발라드로 대중의 마음을 훔치고 그 수익으로 자신의 음악적 영토를 구축한, 가장 영리하고도 순수한 제작자의 탄생이었다.


다른 크리스마스


그 앨범의 수록곡 중 <크리스마스에는>은 유독 결이 다르다.


연인과의 달콤한 데이트나 가족의 화목함을 노래하는 흔한 캐럴들과는 시작점부터 궤를 달리한다.



"내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한 순간들은 항상 내 맘속에 남아 있는데
이젠 그 친구들 소식조차 알 수가 없네.
눈 내리는 밤은 더욱 생각나는 그 시절 즐겁던 기억들
이젠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희미해진 아득한 추억."



노래는 축제의 환호성 대신, 연락이 끊긴 친구들을 향한 아득한 그리움을 먼저 고백한다.


1990년의 겨울밤, 워크맨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에 빠져 있던 사춘기 소년에게 이 가사는 묘한 서글픔으로 다가왔다.



"언제 다시 그곳에서 우리들 노래하며 웃을 수 있나
그때처럼 그 거리를 우리들 얘기하며 걸을 수 있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 대해 묻던 노래는, 후렴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을 빌려 나직한 소망을 피워 올린다.



"크리스마스에는 그 거리에 작은 소망들이 피어나
내 친구들 환한 웃음 다시 볼 수 있겠지."



대부분의 크리스마스 송이 '현재의 행복'을 전시할 때, 이 곡은 '과거의 부재'를 응시하고 '미래의 재회'를 꿈꾼다.


소외된 이 없이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성탄의 참 의미를, 이승환은 가장 사적인 그리움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인 셈이다.


https://youtu.be/NXXaMK0BHoQ

(출처: pops8090)


30년이 흘러도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이승환은 여전히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록커로 살아가고 있고, 나는 어느덧 중년의 음악팬으로 남았다.


오늘 밤에도 눈이 내린다면, 나는 여전히 1990년의 그 소년처럼 이 곡을 선곡할 것이다.


이제야 안다.


이 노래가 슬픈 게 아니라는 걸. 그리움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걸.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화려한 조명 아래가 아니라, 누군가를 기억하는 이 마음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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