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는 비즈니스다(12): 류중일 감독

매니저형 지도자가 남긴 시스템의 명암

by 동물의삽



여러분, 혹시 1982년 잠실야구장이 처음 문을 열던 그 뜨거웠던 여름날을 기억하시나요? 전 국민의 시선이 새로운 메인 스테이지로 쏠리던 그때, 잠실의 담장을 가장 먼저 넘긴 주인공은 당대의 홈런왕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경북고의 유격수, 류중일이었죠.


maxresdefault.jpg 한대화의 3점 홈런 이전에 류중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류중일이라는 인물의 운명을 예견한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순간, 가장 무결점의 상태로 준비된 자가 깃발을 꽂는 '퍼스트 무버'의 등장이었으니까요.


park, kim.jpg 이미 전국구 슈퍼스타였던 고교야구의 전설, 박노준과 김건우

사실 류중일 감독의 이름 앞에는 늘 화려한 스타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고교 시절에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던 '오빠부대'의 원조 박노준 선수와 김건우 선수가 버틴 선린상고가 있었죠. 대중은 선린의 화려함에 열광했고 박노준의 부상에 함께 울었지만, 결국 승부의 정점에서 웃은 것은 류중일이 버틴 경북고였습니다.


류중일은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물 샐 틈 없는 수비와 기본기라는 '시스템의 정수'를 보여주며 청룡기와 봉황대기를 휩쓸었습니다. 스타성은 유입을 만들지만, 결국 최후의 승리는 견고한 시스템을 가진 자의 몫이라는 것을 그는 10대 시절에 이미 몸소 증명해 낸 셈이죠.




TOP3SS.jpg 출처:마이데일리

유격수라는 포지션의 계보를 보더라도 그의 위치는 독보적입니다. 그라운드의 여우라 불리며 기교의 정점을 보여준 김재박과,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야구의 상식을 파괴했던 이종범 사이에서 류중일은 가장 단단하고 우아한 허리 역할을 해냈습니다.


기교나 야성보다는 '교본에 충실한 무결점의 수비 시스템' 그 자체로 존재했죠. 그는 안타 하나를 더 치는 화려함보다, 상대의 안타 하나를 지워버리는 수비의 가치가 비즈니스적으로 얼마나 거대한 자산인지를 알고 있었던 리더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삼성 라이온즈라는 거대 조직의 경영권을 승계받았을 때 꽃을 피우게 됩니다. 류중일 감독은 자수성가한 개척자라기보다는, 선대 리더들이 닦아놓은 비옥한 영토를 물려받아 수익을 극대화한 전문 경영인(CEO)에 가까웠습니다.


P4.jpg 팀빨로 우승은 할 수 있지만 4년 연속 우승은 아무나 못합니다

이승엽과 오승환이라는 압도적인 자산이 있을 때는 그들을 믿고 맡기는 위임의 정석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2014년 끝판왕 오승환이 떠난 뒤에도 미리 구축해 둔 집단 마무리 시스템을 가동해 기어코 통합 4연패라는 대업을 달성했습니다.


물론 누구나 이런 업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삼성 구단이 야구에 많은 투자를 하던 시기와, 류중일이라는 원팀 프랜차이즈가 선수단을 잘 관리하며 우승의 가능성을 어느 때보다도 높였기에 이룰 수 있는 업적이었죠. 현재까지도 해태 시절의 타이거즈 이후 라이온즈 외의 4년 연속 우승은 그 어느 팀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매니지먼트 능력은 국가대표팀에서도 증명되었습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최근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젊은 선수들을 이끌고 우승을 일궈내며 시스템의 힘이 세대와 환경을 넘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었는데요.


2014.jpg 언제나 짜릿한 국대 금메달

비록 LG 트윈스에서의 21억이라는 화려한 계약은 가을야구의 문턱에서 아쉬운 퇴장으로 끝났지만, 그는 대한민국 야구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승리의 매뉴얼'을 제시했던 설계자임은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라이온즈라는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될 수 있었고, 최고의 자리를 밟아본 많지 않은 지도자로 남을 수 있었죠.




이제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은 류중일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 유지현 전임 감독이라는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한 시대의 표준(Standard)이었던 시스템 매니지먼트가 또 다른 형태의 변화와 혁신을 요구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류중일이 닦아놓은 정석의 토대 위에 새로운 리더가 어떤 색깔을 입힐지, 시장은 그 계보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39085.jpg ... 진인사대천명이죠

저는 류중일 감독의 연대기를 보며 프로야구의 감독들이 가야 할 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구단과 팬들이 깔아준 비단길을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시스템의 수혜에 안주하느라 지도자로서의 야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잠실의 첫 홈런을 치며 등장해 21억 최고연봉 감독 자리에서의 불명예스러운 사임을 겪고, 다시금 국가대표의 기틀을 다지고 물러난 그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정한 성공은 시스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시스템을 넘겨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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