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들이 가족에게는 왜 그럴까?
“남편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아내가 갑자기 이상하게 변했어요!”
부부나 남녀 사이에 관계 위기가 찾아올 때 가족 상담사가 흔히 듣는 얘기다.
상대가 변심했다거나, 상대방에게 전에 없던 못된 성격이나 행동이 나타났다고 믿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제 눈에 안경
신혼여행에 간 신랑이 신부의 민낯을 처음 보고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는 농담을 종종 듣곤 한다.
남편이 정말 속았다고 느끼거나, 그동안 봐온 얼굴이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나는 대상이 늘 같은 사람이어도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골라서 받아들인다.
모두 다는 아니어도 그런 경우가 상당하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유령을
따라다니며 사랑한다고 느끼고 부부의 연까지 맺는지도 모른다.
남녀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 틔울 때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말하곤 한다.
남들은 주책바가지 같다고 이야기해도 나는 내 남자 친구의 아재 개그가 재미있어 미치겠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버선도 짝이 있고, 누구에게나 인연이 있다고 말씀하신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가족이 함께 살면서 익숙해진 느낌을 경험할 때 좋다는 느낌이 드는 한편,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점을 찾을 때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점을 상대방이 충족시켜주면 나의 만족도는 높아진다. 결국 상대방의 성격이나 행동만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내 욕구가 우선이다. 내 경험과 욕구에 따라 상대방은 고득점자가 될 수도 낙제점을 받을 수도 있다.
침묵을 금으로 여기는 아빠와 오빠 사이에서 자란 여성은 남자 친구가 과묵할 때 쉽게 익숙해질 수 있다. 만약 여성이 아빠나 오빠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과묵한 남자 친구는 꽤 괜찮은 점수를 딸 수 있다.
하지만 평소 과묵한 가족 분위기가 답답했다거나 숨이 막힌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묵한 남자 친구에게 쉽게 익숙해지지만 싫증도 쉽게 느낄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아재 개그를 해도 이때만큼은 말 많은 남자 친구가 유리해진다.
자신을 웃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유치한 남자 친구가 귀엽게 느껴진다.
제 눈에 안경, 버선 짝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천생연분이라고 믿고 살던 상대가 어느 순간 꼴도 보기 싫은 인간으로 돌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부부가 헤어지자고 결정할 때, 그건 온전히 상대방의 잘못 때문일까?
이혼 위기에 처한 부부 가운데 일부는 정말 억지로 결혼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한때 불꽃 튀는 사랑을 한 커플이다. 나는 가끔 갈등을 겪는 부부에게 연애 시절 사진이나 신혼 초기에 찍은 사진을 가져오라고 주문한다. 연애 시절의 그 사람은 정말 유령처럼 사라진 걸까?
갑자기 사람이 변했어요
미국에 있는 전문 상담기관에서 처음 부부 상담을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이상하게도 이혼 직후의 부부가 상담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혼 전에 상담을 하러 와야지, 왜 이혼 직후에 찾아올까. 나중에서야 주 정부 측에서 부부가 합의이혼을 할 때 아직 어린 자녀가 있다면
필수적으로 상담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남으로 갈라서도 두 사람은 여전히 건강한 양육에 대한 책임을 안고 있다.
원수처럼 살면서 이혼 전의 관계를 지속한다면 아이가 모든 불안을 떠안고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다.
이혼 후 상담은 부부의 연이 끊어지더라도 두 사람이 아이를 위한 양육자로서 서로 협력하고 마음을 모을 수 있게 돕는다. 상대방 탓에 결혼생활을 망쳤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만나는 건 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부부 상담 전문가로 훈련받으면서 나는 이혼을 경험한 부부가 원수가 아닌 친구로 살 수 있는 방법도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한 번은 이혼 위기에 처한 부부가 상담을 신청했다.
각자 전문직에 종사하는 엘리트 부부였다. 40대 중반의 부부는 운동도 함께하고, 쌍둥이 자녀와 주말에 외식도 자주 했다. 그 정도로 꽤 여유 있고 풍족한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아내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녀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아내는 날카로워지기 일쑤였고, 점점 신경질이 늘더니 갑자기 각방을 쓰자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루는 남편이 과음을 하고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내가 남편에게 신발을 집어던졌다. 그러고는 그 길로 가출해 호텔 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인의 권유로 남편과 아내는 각자 따로 내게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남편은 다른 사람처럼 변한 아내를 받아들이기 버거워했다.
사춘기 딸을 버려두고 일주일이 넘게 가출한 엄마를 용서하기 힘든 듯했다. 남편은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면 기꺼이 이혼해주겠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아내 또한 나와 상담하면서 똑같은 불만을 털어놓았다. 갑자기 남편이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원래 남편은 금연 금주를 하는 모범 가장이었다. 직업이 회계사인 남편은 늘 정확했고, 가정사도 꼼꼼하게 돌봤다. 문제는 남편이 회계법인의 공동대표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내가 가장 큰 불만으로 꼽은 것은 남편의 음주였다. 아내는 20년 가까이 남편이 과음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남편이 갑자기 사업상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만취한 채 돌아와 거실에서 기절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아내는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남편이 다시 금주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남편이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 안에
갑자기 돌변한 아내와 남편. 진짜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수개월간의 상담을 통해 나는 아내의 가족사를 탐색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한 가족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대학생일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변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과로로 돌아가셨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아버지는 지독한 알코올 의존증 환자였다.
사업이 어려워지면서부터는 술을 마시면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아버지는 결국 간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마다 어머니는 맏딸이던 그에게 동네 술집에 가서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시켰다. 술 취한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학교 친구를
만난 적도 있었는데, 아내는 그게 자신의 학창 시절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남편을 만나 첫눈에 반한 이유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남자’여서라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사업상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했던 이유가 사실은 자기 내면에서 비롯됐다는 점이었다. 아내는 상담을 통해 자신이 과거에 입은 상처를 충분히 어루만지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갔고, 남편과도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먼저 상대방이 변해야만 관계가 회복될 거라고 믿는다면,
아직 우리는 동전의 한쪽 면만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어 둘의 관계가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고 믿는다면, 상대를 향한 자신의 깊은 욕구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상대방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을 수 있다.
6월 12일!
퇴근길 인문학 수업 - 멈춤, 전환, 전진에 이은 네 번째 관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