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길은 내가 간다
나는 혼자다. 요즈음 선비를 보면 나처럼 혼자인 사람이 있는가?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니 교제하는 법도가 어찌 한쪽에 구속되겠는가. 한쪽에 구속되지 않아 넷이 되든 다섯이 되든 모두 나의 벗이니, 나의 교제의 폭이 넓어지지 않겠는가. 그 차가움이 얼음 같더라도 나는 떨지 않고 그 뜨거움이 땅을 태울지라도 나는 타지 않는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이 오직 내 마음을 따르니 내 마음이 돌아가는 곳은 오직 임금 한 사람뿐이다. 그러니 내 거취가 느긋하게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이 글은 우리나라 최초의 야담집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지은 유몽인이 1604년 세자 책봉 주청사가 되어 북경으로 떠나는 이정귀를 배웅하면서 쓴 편지의 일부다.
어느 쪽에도 구속되지 않으며 마음 가는 대로 혼자이고 싶었던 유몽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유몽인은 외교 업무를 위해 북경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왜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 걸까.
함께 떡을 다투지 않겠노라
유몽인이 살았던 시기에는 당파 싸움이 극심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가 정권을 잡았는데, 유몽인은 당시 북인에 속했지만 어느 당파의 입장에도 서지 않았다.
유몽인과 이정귀는 성균관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로, 서인에 속한 이정귀에게 북인이든 서인이든 따지지 않고 당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유몽인은 1582년에 진사가 되고, 1589년 31세 되던 해에 증광 문과에서 초시·복시·전시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해 삼장 장원으로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그의 글을 보고 당시 대제학이었던 노수신, 유성룡 등이 “지난 백 년 동안 우리나라에 없던 훌륭한 문장”이라 극찬했다.
유몽인은 예문관 검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홍문관, 제술문관 등 문학 관련 관직을 두루 거칠 만큼 문장가로 활약했다. 1608년 1월 28일, 유몽인은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즉위한 후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유몽인은 12일 만에 파직당하게 된다. 선조가 영창대군을 보호해달라고 남긴 교서를 도승지 유몽인이 일곱 명의 대신에게 전달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때 유몽인은 잠시 남산에 머물며 1609년 4월까지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1612년 4월에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대사간과 이조참판까지 지냈다. 그는 고위 관직에 있으면 엮일 수밖에 없는 당파 문제로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인목대비 폐위론이 나오자 이를 반대하고 열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1618년 봄, 안처인의 무고로 일어난 옥사에 대해 〈백주시栢舟詩〉를 지었는데,
이 시화詩禍로 파직을 당하게 된다.
유몽인은 관직에서 쫓겨나 1618부터 1621년까지 와우산과 도봉산 등지에 머물렀다.
북인에 속하면서도 북인이 정권을 잡은 시절에 되레 파직을 당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한번은 이정귀가 유몽인을 대제학에 추천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학문과 문장, 인품을 모두 갖춘 사람만이 대제학 자리에 오를 수 있는데,
문인이라면 누구나 오르고 싶어 한 자리였지만, 유몽인은 거절했다.
당시 정치에 대한 염증이 났던 것이다.
비겁하지 않게 죽음마저 당당하게
유몽인은 은거하며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문집 80여 권과 《어우야담》 등 방대한 분량의 저작을 남겼다. 삼장원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진출한 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민생을 돌아보고 세 번의 연행을 다녀올 정도로 외교 업무에도 뛰어났던 유몽인은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유몽인은 1622년 금강산에 들어가 지냈는데, 그로부터 1년 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일흔의 늙은 과부 七十老孀婦
단정히 빈 방을 지키고 있네 端居守空壺
옆 사람은 시집가라 권하는데 傍人勸之嫁
남자 얼굴이 무궁화처럼 잘생겼다네 善男顔如槿
여사의 시를 자주 익혀 외워서 慣誦女史詩
아녀자의 교훈을 조금은 알고 있으니 猪知妊姸訓
흰 머리에 젊은 태도 꾸민다면 白首作春卷
어찌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으랴 寧不愧脂粉
그 때 지은 이 시의 제목은 〈상부사孀婦詞〉다. ‘상부’는 과부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70세의 과부가 무궁화처럼 잘생긴 남자에게 새로 시집갈 수 없다는 의미를 지녔다. 젊은 나이도 아닌 일흔의 나이에 새신랑을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혼자 단정히 빈 방을 지키고 있겠다고 한다.
비록 광해군이 실각했어도 그를 섬겼던 신하로서 도리를 다하고 지조를 지키고 싶어 새로운 정권에 몸담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유몽인은 북인이면서도 광해군 정권에서 벼슬을 빼앗겼다. 하지만 인조 정권에서 벼슬을 주겠다고 했고, 이를 거절해 결국 광해군 복위 계획에 가담했다는 무고에 얽혀 목숨을 잃는다.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한 유몽인이 광해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유몽인은 국문을 당하면서 “내가 전에 〈상부사〉를 지어 내 뜻을 표현했는데, 이게 죄가 된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온건파인 이원익을 포함해 여러 대신이 그를 살려주자고 했지만, 만약 광해군이 복위하게 되면 훗날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강경파의 반대 논리에 부딪혀 유몽인은 그해 8월 5일 죽음을 맞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몽인은 후대에 와서 광해군을 위해 절개와 의리를 지킨 유일한 신하라는 평을 받고 있다. 유몽인이 죽음에 이른 결정적 이유는 역모 자체가 아니라
〈상부사〉라는 시 한 편 때문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스스로 최고의 문장가로 자부하던 유몽인은 글로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시작했고,
많은 작품을 남기며 이름을 알렸으나 시 한 편으로 생을 마감했다.
혼란의 시대를 살면서 명예와 이익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유몽인.
한순간도 비겁하지 않았던 천재 유몽인의 삶이 주는 울림이 그의 작품보다 더 강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 - 멈춤, 전환,전진에 이은 네 번째 관계 출간!
본 포스트는 퇴근길 인문학 수업 4권 <관계>의
2강 '내 길은 내가 간다'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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