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할머니보다도 나이가 많은 집
벌써 해외에서만 네 번째 집이다. 한국에서 자취 한 번 안 해본 내가 처음 구한 집은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었고 (벌써 6년이나 된 이야기), 그 이후 우트렉 집과 로테르담 집을 거쳐 아인트호벤 집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살아본 집들 중 가장 낮은 층(3층)에 가장 오래된 집(1929년 완공)이다. 언급한 도시들 중 역사도 비교적 짧고 문화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유구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아인트호벤인데 어쩌다 이렇게 오래된 집에 살게 됐는지 나도 약간은 의문이다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살림을 핑계로 신축을 선호하잖아요).
서울에서 아주 인상 깊게 읽은 뒤로 주변에도 여기저기 추천했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하재영 작가는 "집을 선택하는 것은 매일 보게 될 풍경을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 표현을 빌리면, 나는 이번 이사에서 나무와 나란한 높이의 풍경을 선택했다. 아인트호벤에서는 드물게 2차 세계대전 폭격을 살아남은 동네이니만큼, 주변은 대개 4층을 넘지 않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작은 건물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둘러 서서 가운데에는 꽤 넓은 면적의 녹지가 자리하게 되는 보편적인 주거 형태이다. 꾸준한 관리를 요하는 중정의 형태가 아니라, 키 크고 나이 든 나무가 존재감 있게 서있는 제법 야생의 풍경이다. 덕분에 창문 밖으로 다른 사람의 집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고, 나무가 가을색으로 물 들어가는 모습을 아주 천천히, 또 가까이 관찰할 수 있다.
거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집으로 이사 오면서 가장 크게 걱정했던 건 사실 배수였는데, 다행히 난방이나 온수 등 설비도 괜찮은 편이다. 그럼에도 오래된 건물이니만큼 층간 방음은 너무 부실하고, 위층에서 조금 세게 걸으면 마루 끼익 거리는 소리는 물론이고 이따금 천장 등이 흔들리기도 한다. 다행히 위층 이웃이 늘상 그렇게 걷는 사람은 아니고, 한 번씩 친구들을 초대할 때 우당탕탕 큰 소리가 나는 거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는 큰 지장이 없다. 나도 엄청 조심히 걷는다고는 하지만 아랫집은 또 어떻게 느낄지 모를, 정말 종잇장 같은 벽이다.
집의 가구는 한 2-30여 년 전쯤 인테리어를 맞추신 건지 아주 트렌디하지도, 아주 빈티지하지도 않은 결로 맞춰져 있고, 사실 이 점이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이러든 저러든 Furnished 아파트가 내 취향과 100% 일치할 리는 만무하며, 이 정도면 꾸며서 사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수납력이 아주 좋은 구조였기 때문에 물건들을 밖에 꺼내놓거나 소가구를 사지 않아도 되고, 그만큼 혼자 살기 편리하다. 오래된 집 치고는 구조가 탁 트여서 빈 벽들이 많아 아직 휑한 느낌이 있지만 천천히 채워나가려고 한다.
이 집의 가장 큰 (거의 유일한) 단점을 꼽으라면 카페트 바닥이다. 계약할 때도 이 점이 가장 걸렸는데 출근 전에 집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느 정도 타협했다. 캠퍼스 수업이 전면 재개되면서 임대 물량이 턱 없이 부족했던 데다 원하는 조건을 다 맞추려면 월세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카페트 바닥은 실로 세월이 느껴지는 모양새였고 (어디가 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제는 영영 지울 수 없는 각종 얼룩들이 어마어마하다), 위에 타일이나 라미네이트를 깔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런저런 후기들을 찾아보니 결국엔 러그로 가리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 같다. 아직도 청소기 돌릴 때마다 성에 안 차고 걸레로 빡빡 문대고 싶지만, 건식 화장실이 그랬던 것처럼 카페트 생활에서도... 배우는 것이 있겠지... (물론... 21세기에 구태여 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년엔 이사갈래요)
그럼에도 흔히들 말하는 "유럽 아파트"의 전형에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살아보나 싶다. 높은 층고에 앞뒤로 크게 난 창은 해가 쨍한 맑은 날에도 흐리거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도 근사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덕분에 재택근무 환경도 아주 마음에 들고, 이따금씩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한겨울의 미친 돌풍이 불면 꽤 무서울 수도 있지만, 이건 좋은 이불을 사서 꽁꽁 두르면 해결되는 일이니까!
작은 주방은 벌써 정이 좀 들어서 요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식기세척기(!)가 빌트인으로 되어있어서 요리 후 뒤처리가 귀찮아 조리 과정을 하나 건너뛴다든지, 나눠 담을 그릇을 무리하게 줄인다든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다. 퇴근 후 피곤한 컨디션에도 그날 저녁과 다음날 도시락으로 싸갈 음식을 간단히 조리할 힘은 남아있다는 점이 (그리고 그러고 싶게 만드는 주방이라는 점이) 감사한 일이고.
다음 편에서는 새 직장(!) 이야기도 해보려고 합니다... (좋은 얘기를) 할 수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