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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Mar 02. 2019

그 또라이 형님이 그리운 오늘

삼일절 100주년을 맞으며

동경 유학생이었던 1992년 봄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모든 학사 행정을 하지 못했던 시절, 신입 유학생 신상카드에 국적 기입란이 있어, "韓国"이라 적었더니 옆에서 같은 신입생 카드를 적던 한국 형님이 나의 카드를 옆에서 들여다보면서 대뜸 화를 내며 "대한민국"이라 적어라는 것이다.

속으로 "무슨 저런 꼴통 형이... " 하면서 마지못해 고쳐 적자, 다시 귀속말로 일본식 간자체의 "국"자를 다시 제대로 적으라는 것이다. 결국 "韓国" => "大韓民国" =>"大韓民國"으로 되어 아마 지금도 졸업한 대학이 오래된 문서들을 폐기하지 않았다면 나의 국적란에는 "大韓民國" 그렇게 표시되어 있을게다. 

어수선한 신학기가 몇 주 지난 후, 도쿄타워가 보이는 술집거리에서 한국 유학생 단합회를 한다고 당시에 5개 학부의 약 15여 명의  유학생들이 이자카야(居酒屋)에서 술을 먹고 노래방에 갔다. 그런데, 결혼해 애까지 있던 그  꼴통 신입생 형님이 "애국가"를 먼저 부르고 놀자라고 제안하는 바람에 다들 어리벙벙한 얼굴로 쳐다보며 마지못해 다 같이 선창(先唱)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우리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그 형 별명이 "또라이"가 되어 버렸고, 심지어 나 조차도 "아 그 또라이 형" 하면서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졸업 후 방송 작가의 길을 걷는 것이 꿈이었던 그 형은 멋진 문학도의 길을 걷고자 했어나, 집안 문제로 결국 졸업을 못하고 한국으로 귀국해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3.1절 100주년을 맞이하는 아침.
간밤 사이에 눈이 내린 탓에 천천히 출근길을 재촉하는데 늘 지나가는 출근길에 두 개의 성조기가 거친 눈발에 펄렁이고 있어서 차를 길가에 세우고 사진을 찍어봤다. 하나는 기중기를 대여해 주는 조그마한 회사 입구에, 또 하나의 큰 성조기는 기중기 끝에 달아 공중에 세워뒀는데 회사 옆을 지나가는 고속도로의 운전자들에게 보이려고 달아 놓은 듯하다. 

이곳에서 성조기는 기업이나 가정이나 할 것 없이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상시적으로 걸려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우리 집에도 이웃집 눈치를 보면서 걸어 놓을까 생각했는데, 아직도 20년이 넘도록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지라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미국인들의 성조기 사랑이 각별한 예가 또 있다. 작년 봄 딸과 메릴랜드주의 애너폴리스(Annapolis)에 위치한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이 학교 출신의 퇴역 해군 장교였던 할아버지가 가이드 역할을 맡으며, 교정 내의 박물관 안에 박물관 한쪽에 길게 전시된 낡고 찢어진 성조기를 보여 주었다. 그 성조기가 인천 상륙작전 때 미 해병대가 달고 상륙했던 첫 구축함 Ozburn(DD 846)의 뱃머리에 달린 것으로, 당시 피탄을 받아 찢어진 것을 어느 해병이 품에 들고 와 이곳에 70년 넘게 전시되어 있다고 전해 줬다.     

또라이라 불렀던 그 형을 30여 년 만에 기억해 보니, 그간의 나의 족적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2년간의 요코하마 캠프스에서 학창생활을 보내고도 그 캠프스 지하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해군 작전본부가 미군의 폭격을 피해 만들어져 운영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동경 YMCA 건물 안에 위치한 관동 유학생회 사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그곳에서 2.8 독립선언을 했고, 그곳에서 작성된 선언서가 3.1 독립선언서의 초안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다녔다.

동경 근교에서 열렸던 재일교포 체육대회에서 목이 터지라 우리 지역 교포들을 응원해도 정작 내 옆에 앉아 말 없이 힘 없이 경기를 지켜보던  키 큰 할아버지가 우리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생님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누구도 우리의 역사를 가르쳐 주지 않으니 모르는 것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를 변명으로 일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자라는 우리의 후세에게 수많은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민초가 희생양이 되고 국권이 유린된 부끄러운 내 조국의 역사와 치욕의 일제 식민치하를 또 언제 겪지 말라는 보장은 미래의 역사교과서 어디 페이지에도 나와 있지 않다. 

요즘 세상에 대한민국 어디에서 국경일이더라도 노래방에서 애국가를 선창하는 또라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이 돼도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는 유행가는 달달 잘 외워도 "애국가"  4절을 다 못 외우면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한다. 가만히 글자 수를 세어보니 반복되는 후렴구 가사만 빼면 "소양강 처녀" 보다  더 짧은 것이 우리 애국가이다. 

건곤감리의 복잡한 작대기라 우리의 태극기가 그리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TV 드리마 2-30분 안 보고 몇 번 정신 차려 그려보면 그릴 수 있는 게 100년 전 우리의 독립을 외쳤던 선열들이 들었던 태극기이다. 

내 조국 대한민국.
조국이 내게 해 준 것은 없다고 하지만, 나를 낳아 준 부모가 살아왔고, 묻혀 있는 곳이고 아직도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와 가족들이 생활하는 터전이다. 그 조국에서 100년 전 오늘 삼천리 곳곳에서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그 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분명 항거로 엮어진 세계사에 없는 평화 독립운동이었음에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대한의 사람으로 자긍심을 가지며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다시는 그 형을 또라이라 부르는 부끄러운 나의 과거사를 반복하지 않으려 만세 삼참을 반복해 본다.

대 한 독 립 만 세
대 한 독 립 만 세
대 한 독 립 만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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