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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Apr 24. 2018

청포도 익어가는 칠월

아련한 또 하나의 옛 추억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 보르도(Bordeaux)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옛부터 포도 수확 철이 다가오면 마을 축제가 열리는데, 그중 최대 이벤트는 혼기가 찬 청춘 남녀들이 전통에 따라 하아얀 블라우스를 이쁘게 차려입고 지중해와 맞닿은 광활히 펼쳐진 포도밭에 들어가서 포도를 따는 일이라고 한다.

평소 바쁜 농사일로 인해 서로의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상큼이 영근 포도밭에 들어가 좋아하는 연인에게 다가가서는, 자신의 마음 문을 열어 사랑의 밀어(密語)로 고백하면서 포도를 따다 보면 어느새 하아얀 블라우스는 자줏빛 포도색으로 물들어 간다.

그리고, 대낮 햇살에 달궈진 지중해의 에메랄드빛 파도가 달빛에 부서지며 은빛으로 반짝거리듯 땅거미가 밀려오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커플은 축제에 무르익은 마을 광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저 멀리한 채 포도밭에 있는 원두막 집에서 단 둘만의 아름다운 시간을 밤늦게까지 보낸다고 한다.

그런 후에, 이들이 추수를 마치고 결혼을 해서 그때가 계기가 되어 태어난 아기를 "Grape Baby"라 부르고, 훗날 그들 부모가 입었던 곱게 물든 블라우스는 아담한 흙토색 올리브 나무 상자에 고이 간직해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물려준다고 하니, 한국의 어르신들의 유교적 정서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부모의 사랑의 증표를 자녀에게 물려준다는 건 나름 아름다운 풍습 같기도 하다.

때는 과거로 돌아가 1999년 7월 4일, 독립 기념일이 지나고, 당시 청년이던 내가 그토록 가슴 시리게 좋아했던 한 연상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 뉴욕에서 LA로, 거기서 다시 난생처음 낡은 프로펠러 쌍발기로 갈아 타, 한 시간 반을 날아 그녀가 사는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위치한 프레즈노(Fresno)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을 향한 적이 있었다.

약 일주일의 여정에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그녀와 결국 헤어지고서는 다시 LA후배 집을 향해 태평양 연안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1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녀에게 선물로 전하려 했던 시집 한 권을 객기를 부리며 도로 양쪽에 광활히 펼쳐진 이름 모를 포도밭을 향해 던져 버리고서는 결코 그녀를 생각지도 기억지도 않겠다고 야무진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어언 18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왠지 청포도 익어가는 칠월이면 그때의 여름 햇볕이 작렬이 내리쬐는 지평선 너머로 한없이 펼쳐진 캘리포니아의 그 포도밭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또 하나의 그리움이 되어, 이내 추억으로 남아 맴돌다 나에게 설익은 포도송이 한 알 한 알 마냥 새롭게만 영글어 가면서 다가온다.

이따금 아내에게도 그때의 애기를 문연듯 주책없이 흘리듯 말하면, 버럭 화를 내면서 왜 지나간 과거의 여자를 쓸데없이 생각하냐고 하면서 매몰차게 핀잔을 주곤 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단순한 "기억"으로 여겨지는 일을,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으로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싶은 것은 이미 중년의 나이로 접어든 한 남자의 그냥 의미 없는 로맨스일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눈 지그시 감노라면 청포를 입고 올 것만 같은, 그러나 영원히 올 수 없는 나만의 그녀을 향한 아련한 그리움일까...?

지금은 이 하늘 아래,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그 임을 하아얀 모시 수건으로 고이 준비할 수 없을 만큼 세상 욕심에 물들어 버린 나 자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이기적인 추억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문득 부끄러워진다. 추억만을 쫓고 사는 여린 감성 풍부한 10대의 어린 나이도 아닌데 말이다.

칠월도 중순인 오늘. 퇴근 후 오후 늦게까지 아들과 함께 자전거 타다 이웃 동내 담벼락에 오늘도 조용히 영글어만 가는 포도를 폰으로 살짝 담고서는, 아들과 함께 아내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집으로 향하면서 새삼 이육사의 명시(名詩 ) "청포도"를 나도 모르게 더듬더듬 읇고 있었다.

그럼, 밴드 여러분, 더워만 가는 칠월도 청포도 덩굴 아래의 시원함을 생각하며 상큼하게 잘 지내시길....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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