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의 인연

by Eric

타국살이를 하다 보면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지만, 왠지 같은 동포를 만나면 편안하고 정이 가는 게 인지상정인가 보다. 나 역시, 이 땅에 살면서 많은 동포들을 만났지만, 그중에서도 16년 전 뉴욕에서 아르바이트할 때의 "인연"으로 만나, 지금은 나이 80을 바라보는 시카고에 혼자 사시는 어머니라 부르는 어머니(?)가 있다.

바람의 도시 Chicago.
2001년 겨울, 몹시도 추운 크리스마스 전전날 자정, 신혼이던 아내와 부부싸움을 한바탕 하고 나서, 객기로 집을 박차고 나와 차 안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시카고로 이사 간 그 어머니가 생각나 바로 차 핸들을 일리노이로 향하는 80번 고속도로로 돌려 1300여 킬로를 달려 18시간 만에 도착한 곳...

오늘 퇴근하는 길에 시카고 사시는 그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 와 시카고에는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 이제는 아무도 없어 뉴저지 쪽으로 노인 아파트를 알아봐 달라는 연락이 왔다. 지독히도 추웠던 이번 혹한을 무사히 견디셨는지 전화기로 들려오는 음성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귓전에 쩌렁쩌렁 울린다. 전화를 끊고 눈발을 헤치며 집을 향하면서, 옛날 그곳에서 있었던 일화가 생각나 적어 본다.

1947년 미국 위스콘신주에 있는 시카고 대학 부설 천체연구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와 한 젊은 과학자가 받았는데 내용인 즉, 시카고 대학에서 겨울방학 동안 고급 물리학 특강을 해달라는 대학 측의 요청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 부탁을 흔쾌히 받아 주었지만, 다시 몇 주 후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 측의 설명인 즉, 학생 수가 너무 적어 강의를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학생이 과연 몇 명인지 묻자, 학교에서는 2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인원의 크고 적음에 개의치 않고, 두 학생을 가르치겠노라고 했다.

시카고를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워낙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제설작업을 많이 한 탓에 도로의 중앙선도 닳아서 제대로 안 보일 정도이고, 요즘같이 인터넷 화상 수업도 없던 때라 매서운 오대호의 추운 겨울 칼바람과 눈보라 치는 도로를 다니기 조차도 힘든 왕복 4시간 걸리는 거리를 그는 매번 일주일에 2번씩 단 하루도 빠짐없이 강의를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1957년.
이 젊은 과학자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나란히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는데, 한 사람은 중국인 양첸 닝 박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리충도라는 역시 중국계 미국인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스톡홀름 수상식장에 마련된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된 것은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한 번도 불평불만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강의했던 그 박사님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이 상은 결코 못 받았을 것입니다. "

그가 바로 인도계 출신 찬드라세카르 박사로 우리나라의 우장춘 박사처럼 인도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도 역시 제자보다 늦기는 했으나, 천체 물리학계의 뛰어난 업적을 남김으로 해서 1983년 노벨 물리학 상을 수상하게 된다.

일확천금에 모든 것을 걸고, 모로가나 도로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는 한탕주의적 사고가 만연하고,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만을 중시하는 결과 지상주의적 사고로 철저히 무장된 오늘날의 우리들이라면, 학생 둘 밖에 없고, 추운 겨울 날씨로 언제 사고가 날지도 그런 상황하에서 나라도 너무나도 쉽게 포기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장 누가 알아주는 이 없어도, 자신의 강의가 지금 당장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묵묵히 하나하나 그 제자와의 인연에 정성 들여 가르쳤던 것이다.

인터넷이란 문명의 이기(利機)의 발달로 만나지도 보지도 못한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각자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사진이나 취미, 심지어 가치관까지 나누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역으로 언제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관계가 뒤틀리면 쉬이 끊을 수도 있는 그런 SNS상의 만남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우연(偶然)"인지, 아님 귀한 "인연(因緑)"인지, 그런 인연이라면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도 시간을 허비하는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아름다운 사람의 인연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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