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옛사랑 편지
올해 9월이면 고등학교를 진학할 딸, 레이첼이 학교에서 학부모들의 결혼 전의 사진을 가지고 친구들끼리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지난 주말 지하실 보일러실 옆의 스토리지에 보관한 종이 상자들을 뒤져 보니, 아내와 사귈 때 이메일로 보낸 것을 프린트해 놓은 해묵은 A4 용지 3장의 편지를 발견했다.
당시, 아내는 뉴저지에 있는 처형 집에 얹혀살았고, 난 허드슨강 건너 뉴욕 퀸즈의 월 $350불짜리 다락방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였던 것 같은데, 암튼 먼지를 털고 글로 다시 타이핑해 보니, 역시 젊었을 때라서 여자 꼬시려고 작심한 마냥 내가 읽어도 부끄럽고 낯 뜨거운, 그러나 다소 감수성을 띤 청년이란 생각에 감회가 새롭다.
돌이켜 보니,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그간 15년간의 결혼 생활 속에서, 아래의 계절마다 나오는 4군데 중 캐나다 국경에 인접한 뉴헴프셔만 아직 같이 가지 못했는데 언젠가 겨울이 또 오면 꼭 아내를 데리고 가고 싶다. 족히 차로 12시간 걸리는 거리지만..
사랑하는 그대에게
.
...(중략)
.....
꽃 피는 봄날 아침,
이른 새벽녘 새봄을 알리는 파랑새의 지저귐에 곤한 잠 깨어 아침 안갯속에 아롱들이 이슬 맺힌 풀밭 길을 건너, 봄비를 함초롬 먹은 들풀의 새싹들이 파릇파릇 피여 있는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의 넓은 평원을 함께 거닐며 노오란 민들레 품을 떠난 홀씨들과 연분홍 벚꽃 그 꽃잎들이 꽃내음 곱게 푸른 창공에 흩날리고, 비발디(Vivaldi)의 "사계" 보다 더 감미로운 곡조로 온누리에 평화로이 울려 퍼지는 어느 오래된 작은 교회의 나지막한 아침 종소리를 들으면서 봄의 향연을 만끽하는 그럼 봄날을 기다리고 있소.
그대와 나, 둘만의 따스한 만남을 만끽하듯...
햇살 따가운 여름 낮,
시원히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닷바람 맞으며 에메랄드 빛 탐스럽게 물든 바닷물에 에워싸인 커리비안(Caribbean) 해안의 이름 없는 무인도에 작은 돛단배 고즈넉이 띄워 놓고, 그대가 제일 좋아하는 그래서 나도 따라 좋아하는 바닐라 향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선 작렬히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둘이 다정히 손잡고 그 해안가 모랫 사장을 밟으며 밀려오는 파도가 조개껍질들을 삼킬지라도 그대와 나가 만들어낸 네 발자국만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사뿐히 지르밟아 남겨고 싶소.
그대와 나, 둘만의 아름다운 사랑의 자국을 영원히 남기듯...
낙엽 지는 가을 오후,
하얀 자작나무와 붉은 단풍과 노란 떡갈나무가 온통 색동색 잎으로 곱게 갈아입은 산속 오솔길이 굽이굽이 새겨진 아팔랫치산 등성을 같이 타면서 계곡 곳곳이 흐르는 시냇물 거슬러 산 사슴이 낙엽을 밟으며 우리의 추억을 따라오다 지친 뉴욕의 베어 마운틴(Bear Mountain) 정상에 올라 더 넓게 펼쳐진 대서양이 맞닿은 지평선 끝까지 들려지도록 목소리 높여 산울림을 외치며 저물어 가는 붉은 석양을 내려보며 그대의 눈동자에 황홀히 비친 그 맑은 영혼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눈빛으로 채우고 싶소.
그대와 나, 둘만의 은은히 향기 풍기는 그런 맑은 영혼을 채워가듯...
눈 내리는 겨울밤,
달빛마저 얼어 부서지는 차가운 보름달 떠있는 하늘에서 보드라운 은가루가 내려온 세상을 조용히 덮는 그 겨울밤이 찾아오면, 이 세상 사람들의 그림자도 없고 인기척도 닿지 않는 뉴햄프셔(New Hampshire)의 깊은 산속 깊숙이 숨어 있는 크지도 않은 조용한 호숫가의 향나무로 엮은 작은 통나무 집에서 모닥불을 은근히 피우고, 헤즐렛 향 원두커피를 내려놓고 나무 장작이 자신을 불태우며 훈훈히 전해 주는 따스한 온기가 온 거실을 감싸 돌면 단둘이 호주산 양털이 곱게 깔린 러브 소파에 편히 앉아 어깨를 다정히 기대며 우리의 미래를 나누며 사랑을 속삭이는 행복한 그런 시간을 엮어 가고 싶소.
그대와 나, 둘만의 행복한 미래를 엮어 가 듯...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이 사계절이 25번, 50번, 100번이나 지나가도,
하나님이 선물한 장구한 이 세월이 유유히 구름처럼 강물처럼 흘러가도 그대와 나가 몸도 마음도 모두 둘이 아닌 하나 되어 더불어 삶이라는 질곡의 시간을 보내면서, 때로는 서로에게 서운하고 힘들 시간이 올지라도,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 주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때로는 모두가 서러워 눈물 흘리는 나날들이 설령 닥쳐올지라도, 또 때로는 우리 아닌 다른 우리로부터 가시와 같은 아픔에 상처받아 아파하더라도 "처음처럼" 이란 말을 언제나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면서 천수를 누리는 원앙처럼 비단보다 곱고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 가고 싶소.
그대와 나의 영원한 부부의 연을 맺듯...
내가 당신보다 하루 더 살 수 있는 그날까지.
우리 함께 걸어 온 인생의 사계절을 마감할 그때까지.
.....
...(중략)
.
그대가 보내는 사랑에 흠뻑 취한 이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