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미미츠카에 얽힌 전설
여행을 준비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여행과 미리 가서 구경할 곳을 사전에 정해 놓고 길을 나서는 여행에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전자에는 뜻하지 않은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에 대한 "신선함"이 있는 반면, 후자는 목적지에 다다른 후의 "감동과 아쉬움"이 있다.
1993년 여름, 당시 방학을 맞이한 나는 일본 열도를 횡단할 요랑으로 동경역에서 완행열차표를 사서 종착역인 시모노세키(下関)항을 들려 부관(釜関) 페리로 부산에 들릴 대략적인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터라, 여행 도중에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전혀 정하지 않은 채, 도중에 교토를 들렸을 때는 말 그대로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하는 여행이었다.
자전거를 렌트해 등살 따가운 한여름의 햇살을 뒤로하고 古都의 흔적이 고스란히 베여 있는 옛 거리와 언덕들을 오르내릴 때에는 마치 時空을 몇천 년 전으로 되돌려 놓은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옛 것에 대한 고매함에 매료되었었다. 그리고, 어느 아담한 산사의 낮은 담 너머로 흘러나온 향불 태우는 香이 너무나도 진하고 감미로워 그 향기에 이끌려 페달 졌던 발길을 멈추고 그 산사의 문을 두드렸던 아련한 기억은, 뉴욕시내 최고급 백화점에서만 판매하는 아로마 향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내 뇌리 속에는 그 내음은 결코 잊지 못할 신선함 그 자체였다.
나의 오감을 흔들어 놓았던 그 교토를 23년 만에 지지난 주 다시 찾았다. 지루한 장마로 인해 한 주를 연기한 탓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갈 곳을 정해 놓고 가는 여행이라 아침 일찍 서둘러서 전철을 타고 교토를 향하는 마음은 기다림에 대한 설렘으로 남아 급행으로 달리던 전철보다 더 급하게 옛 추억으로 향하고 있었다.
40여분을 달려 들린 곳은 미미즈카(耳塚).
먼저 미미즈카를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귀무덤인데, JR교토역에서 동북 방향으로 30여분 정도 걸어서 호코사(方廣寺)절에 있다 길래 찾아가는 그 절 건너편 한컷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자 남아도는 무사들에서 일거리와 쇄약해 가는 명나라를 치기 위한 명분으로 조선정벌을 감행하면서 일본군에게 한 명당 적어도 한 명의 조선인의 목숨을 빼았어서 증표를 가지고 오라고 명한다.
그러나, 원래 죽인 사람의 목을 싣고 오는 데는 한계가 있어, 그의 부하 장수들은 임란 중에 우리의 선량한 민간인이나, 군인, 그리고, 일부의 명나라 군사들의 코를 베서 소금이나 간장으로 부패하지 않게 절여서 나무상자에 보관해 토요토미에게 바쳤고 그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략 12만 명분 정도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토요토미는 그들 부하의 공을 이것으로서 인정하고 죽인 자들의 코라고는 하나, 그들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당시 일본 각지의 유명한 사철 주지들을 불려 들여 이들을 위해 공양한 후, 이곳에 분봉을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이 귀무덤이다. 원래의 이 묘의 이름은 하나즈카(鼻塚,코무덤)였으나, 코를 베서 가져온 무덤이란 그 잔인하다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에도 이후에 무덤의 이름을 귀무덤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리고 들린 다른 한 곳은 바로 길하 나를 두고 웅장히 자리 잡고 있는 토요쿠니신사(豊国神社).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패가 있는 이곳은 축구장 반 정도의 큰 크기의 신사내에 본당이 있고, 그 신사 위의 지붕은 학의 조각상이 있는데, 당시의 조각가들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 학에 눈을 새겨 넣으면 학이 날아간다는 미신이 있어 일부러 눈을 그려 넣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을 정도로 화려한 모모야마(桃山) 문화의 표본으로 여겨져 일본 국보로 잘 보관되어 있다.
그에 비하면 이 귀무덤은 주위가 쇠창살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을 뿐, 그 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있기는 하나,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잡초가 무성하고 나 있고, 일본어와 한국어로 이 묘의 설명은 있어, 행여 해서 마침 지나가는 일본 젊은 커플에게 이 무덤에 대해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여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이 무덤의 유래를 설명해 주었다.
더더욱 안타까운 건, 토요토미를 기리는 그 신사내의 보물관(寶物館)은 1925에 당시로서는 귀한 유리판으로 그의 유물들을 장식해 놓았는데, 그중에 이 정복자의 사랑니가 아직도 소중히 보관되어 있지만, 힘이 없어 정복당한 이들의 코와 귀는 처참히 도륙당해 이국땅에서 묻혀 있으니, 아무리 역사가 정복 한자, 그래서 승리한 자 중심의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12만 명의 코는 그 흔적도 없어 썩어지고, 그 코를 벤 자의 한 조각의 이는 400년이 지나도 중히 보관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한일 간의 비운의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자괘감에 한없이 빠지고 만다.
교토 서편에 자리 잡은 아라시야마(嵐山)에 걸려 있는 석양을 보면서 저녁을 먹고 오오사카로 돌아가기 위해 들어선 교토의 중심가는 벌써 교토 최대의 기온마츠리(祇園祭り)를 준비하느라 축제 분위기로 한창이고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와 음식점에서 저마다의 한여름밤의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과연 이 왁작지컬한 거리의 많은 사람들 중에 이 불운한 한일 간의 역사를 아는 이는 과연 몇 명이나 있을지...
질곡으로 얼룩진 시대는 바뀌고 또 바뀌어 가고, 이 한 개의 이빨과 12만 개의 코가 아이러니하게도 고작 30 미터도 채 안 되는 도로 하나를 두고 자리 잡고 있는데, 아직도 두 나라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3천 킬로나 떨어져 있는 듯한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이 무덤 속에 잠든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서 23년 전 교토를 들렸을 때 피우지 못한 그 향불을 이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향불로 피우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