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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Apr 24. 2018

누가 이 여인의 묘를 아는지?

감춰진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 앞에서..

부산시 남구 용호동. 오륙도가 바로 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위치한 천주교 공동묘지의 사무실을 찾은 건 한국 출장 중이던 2015년 여름 7월 25일 토요일 오후.

허름한 컨테이너에서 한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묘지 관리인에게 어느 묘지의 위치를 묻고, 낫을 빌려 벌초하러 관리소가 위치한 산 중턱에서 아래로 가파른 비탈길을 나섰다.

이곳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말부터 초중고를 다니면서 거의 10여 년을 살아온 동래다. 삼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어린아이 걸음으로도 30여분을 걸어서 산 등성이만 넘으면 동으로 멀리 해운대가, 남으로는 백운포와 오륙도가, 서로는 신선대와 부산항 너머 영도가 보이는 부산에서는 전형적인 서민들이 사는 곳이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초등학생 때는 근처 산으로 바다로 봄가을로 소풍을 가기 때문에 산 너머 바닷가 언덕은 늘 나와 또래 친구들의 놀이터였고, 여름이면 바닷물에 멱감고, 가을이면 메뚜기 잡고 코스모스가 산길 오솔길을 따라 지천으로 곱게 피던 사람의 인적이 전혀 닿지 않은 그린벨트 지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해안선을 따라 삼엄한 해안 초소들이 있었고, "천주교 용호 공원묘지"가 제법 큰 규모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향한 곳은 그 공원 묘역의 한쪽 구석에 부산 영도로 피난을 와 살다가 1954년에 세상을 떠나, 1974년에 이곳으로 이장잡초가 무성한 자그마한 묘지로, 푸른 부산 앞바다를 바라 보고 안식하고 있다.

그 묘비의 이름은 안성녀(安姓女, 천주교명 안누시아).
때는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 1910년, 그녀의 친어머니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글을 옥중에 있는 그녀의 친오빠에게 적어 보낸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비석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너의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再會)하기를 기대치 아니하노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善良)한 천부(天夫)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바로 이 편지는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의 어머니, 카톨릭 신자인 조 마리아 여사가 1910년 2월 14일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 선고가 뤼순(旅順) 형무소에서 내려지자, 안 의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내용이고, 바로 그 묘의 주인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의 하나밖에 없는 친 누이동생이다.

안 의사의 어머니 친필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한 달 뒤면 교수형에 처해질 자기 배 앓아 낳은 천하보다 귀한 장남에게 입힐 수의를 직접 하얀 명주 옷감 위에 한뜸 한뜸 바느질 해 가는 조 마리아 여사의 바늘 든 손이 천근, 아니 만근보다 무거웠을 거라 감히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조선의 가냘픈 여인의 가슴속에는 "자식 사랑"보다 "나라 사랑"이 우선 됨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는 비장한 글이다.

당시, 하얼빈은 청나라의 쇠망으로 열강 러시아의 사실상 통치 관할에 있었고, 1909년 10월 26일, 초대 일본 내각 총리를 지낸 일제의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가 하얼빈역에 도착한다고 하자, 러시아측은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그를 시해할 수 있다는 보안상의 이유로, 환영식이 열리게 될 역 플랫폼에 동양인의 출입을 통제하려 하자, 이토는 중국이나 조선에는 감히 자기를 위해(危害) 할 그런 기개 있는 인물이 없는 미개한 나라이니 자기를 환영하려는 일본인들까지 막을 수 없다며 경계를 완화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것이 안중근 의사에게는 러일전쟁 후 교만에 사로잡힌 그의 목숨을 빼앗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사건 발생 직후, 뉴욕타임스 등 주류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등 세계를 놀라게 했고, 특히 하와이의 중국계 미국 일간지(Hawaiian Star)에는 "중국인들이 종종 한국을 약소국이라 무시한다. 그런데, 중국은 한국보다 인구가 20배 이상 많지만, 왜 중국은 4000년간 자기 스스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없나..."라고 개탄해하며 안 의사의 의거를 칭송하였다 한다.

현재 중국의 요녕(遼寧) 반도 남단 따이렌(大連) 군항인 옆에 위치한 뤼순 감옥소는 원래 일반 감옥소가 아닌 군 감옥소로서 일제가 그곳을 강점하여 지었고 한, 당시 일제에 항거한 단재 신채호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등 많은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어 고문당하고 순국한 곳인데,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완강히 살아생전 일제에 굴복을 하지 않자,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했고, 처형대 밑에 나무통을 받쳐두고 주검이 나무통에 떨어지면 무릎이 접히게 해, 그 무릅 굽힌 모습을 한 채 형무소 뒷산에 매장시킬 정도로, 일제는 우리 독립투사들을 죽도 모독했다고 통한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홀로 된 조마리아 여사에게는 장남 안중근 의사를 비롯 밑으로 딸 성녀(姓女), 두 아들 정근(定根), 공근(恭根) 이렇게 네 자녀를 두었지만, 일제 때 중국으로 만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다른 두 아들의 유해 역시 행방불명이라 묘 자체도 없고, 오로지 외동딸만 이곳 천주교 묘역에 안장되 허름한 콘크리트를 굳혀 이름을 새긴 초라한 비석이 그녀의 묘임을 짐작케 하고 있다.

많은 독립군의 뒷바라지에 일신을 받쳤던 안성녀 여사는 스스로가 "살아 있는 것도 나라에 누가 된다"며 정부의 독립군 후손으로서의 지원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천주교 신자로서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였다고는 하나, 묘지 옆 열에 일개 촌부의 묘지에도 화강암이나 대리석으로 비석을 세워 놓건만, 그녀의 잡초 무성한 묘소에는 싸구려 콘크리트로 만든 묘비만이 그녀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가문에 대한 한 국민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도 해 드리지 못함에 부끄러움이 앞선다.

안의사의 친누이의 묘에 풀을 베면서 잠시 바다를 해 앉아 쉬고 있노라니, 우리나라 해군 작전 사령부 부대가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오륙도 바다가 보이는 해안에는 족히 20층은 넘어 보이는 고급 아파트가 큼직하니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나라"를 지킨다고 근무하는 저 많은 군인들은,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 이 곳에 고이 묻힌 이 여인의 묘를 알고나 있는지...
저 고급 마감재로 지어진 아파트의 현관문은 비싼 대리석으로 치장이 되어 있을 텐데, 나라 위해 목숨 바치길 아까워 하지 않던 이 여인의 묘비는 고작 몇 만 원도 안 되는 싸구려 콘크리트로 비석을 세워 드렸어야 했나.......

안여사의 묘지에서 내려다 본 오륙도와 아파트

돌이켜, 나의 초등학교 시절, 교실에서 국사 수업 시간에 안중근 의사에 대해 배우고도,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산소 위를 아이러니하게도 철없이 뛰놀았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하니, 그때 진작 알았더라면, 산소에 무성한 잡초 한 포기라도 뽑아 드렸을 것을....

작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는 국사교과 국정화 문제나,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두고 진보와 보수 사학자 간의 싸움이 정치판에 까지 번졌었다. 나는 이렇게 서로 싸우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 싸구려 콘크리트 묘비가 세워졌던 이 곳을 꼭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서, 이 나라가 누구를 위한 나라이야 하며 우리 자라는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면 한다.

돌이켜 보니, 그 해 여름 벌초를 마치고 다시 산 중턱을 향하는 산길에 60여 년의 세월을 그녀의 산소 주위에 곱게 피어 온 이름 모를 노란 들꽃들을 언제 다시 보나 하며 떠나는 발길이 무겁기만 했던 기억이 새로운데, 적어도 나의 이 글을 읽는 사람들만이라도 선열의 피로 지켜온 조국 산하의 그 흔한 잡풀 한 포기도 선열의 숨결 닿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기대하고 후대에 알려주길 간절히 바란다.

혼자 걸으면 "길"이지만, 함께 걸으면 "역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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