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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Apr 25. 2018

이것이 백성이냐!

또 다른 백성을 위해 흘리는 눈물

아들 예준이가 외가를 닮아서인지 사춘기로 접어들수록 조금씩 반 곱슬머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올해가 가기 전에 눕지도 서지도 않은 지저분한 스타일을 바꿔보려고 늘 다니던 이발소 대신에 한인 타운에 새로 생겼다는 미장원에 데리고 갔다. 오랫동안 머리 깎는 일을 해온 듯한 미용실 주인은 우리가 처음 온 손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그리고, 아들 머리를 바지런히 만지작거리면서 나의 사투리 억양이 있는 한국말을 듣고 고향이 경상도 같다며 자기는 경북 포항이 친정이라 한다.

그래서, 최근 발생한 지진에 식구들은 잘 있냐고 물어보다 순간 내 뇌리에 한국동란 때 포항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학도의용병 이우근 학생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 학도병을 아느냐고 물으니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잘 모른다고 답했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 미용 잡지를 보고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앉아 있던 20대 후반의 젊은 남자 미용사가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왜 그런데 가서 죽는데요"라며 핀잔을 주듯 말을 내뱉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욱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1950년 8월 서울에서 중학교 3학년을 다니던 이우근 학생은 군복 하나 제대로 마련해 주지 못한 가난한 조국이 풍전등화에 놓이게 되자 어린 나이로 교복을 입은 채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그 치열한 포화 속의 포항전투가 끝나자 시신 수습을 하던 중 그가 전사하기 직전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호주머니 속에 피 뭍은 채 발견되어 나중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지난 10월 한국에서 상영된 적이 있는 "남한산성(Fortress, 요새)"이 이곳에도 한 달 가까이 상영됐지만 갈 시간이 없어 관람은 못 하고, e-Book으로 작가 김훈의 원작을 읽어 내려간 적이 있었다. 문득, 그 소설 초반에 나오는 송파나루의 뱃사공이 내뱉은  말과 이 남자 미용사의 말과 공교롭게 오버랩이 됐다.

그 책 속에는 척화파인 예조판서 김상헌이 인조의 남한산성 파천 (
播遷) 소식을 뒤늦게 듣고 어전 일행을 뒤따르기 위해 송파나루에서 어른 딸이랑 같이 사는 뱃사공에게 강물이 얼은 곳을 잘 찾아 안내해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그 사공은 인조의 어가(御駕)를 인도해 강을 건너게 했는데도 좁쌀 한 줌 받지 못했다고 투덜대며 "오랑캐 군이 들이닥치면 그들에게도 얼어붙은 강을 안내해 주고 좁쌀 한 되라도 챙겨주면 딸이랑 같이 한 끼라도 배불리 먹고 싶다"라고 말을 건넨다.

그때 김상헌은 사공의 무심결에 흘린 속내가 드러난 말을 새겨듣고는 "이것이 백성이냐, 이것이 백성이었던가...."라고 속으로 절규하며 자신과 같이 남한산성으로 가기를 사공에게 청한다. 하지만, 사공이 이를 거절하자, 그를 살려두면 청군에 협조해 십만의 적들이 강을 건너 진격해 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칼로 그의 목을 치자 마르고 늙은 사공의 몸이 선혈을 뿜어내며 찬 강바닥에 쓰러져 죽는 장면이 나온다.

예조판서로 백성이 내는 녹(祿)을 먹고사는 고관대작이라고는 하지만, 지은 죄도 없이 가난에 굶주려 하루하루가 힘든 이 백성에게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종묘사직에 대한 보존 등은 안중에도 없음을 그가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냉혹한 현실 앞에서는 사대부의 충정은 빛 좋은 개살구처럼 공허한 구호로 들릴 뿐이며, 국가의 존망과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는 신하 김상헌의 고뇌가 오늘 무엇을 먹고 삶을 연명할 것인가로 걱정하는 송파나루의 뱃사공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아마도 작가 김훈이 이 소설에서 김상헌은 힘줄과 핏줄들이 얼기설기 드러난 앙상한 사공의 목을 치자 사공의 피가 튀인 그의 얼굴에서 연민의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적었는지 모른다. 

춥고 배고픈 겨울날에 하루라도 더 어린 딸을 먹여 살리려고 발부동치던 소설 속의 사공이 흘린 그 붉은 피. 나라를 구하고자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김상헌의 충정 어린 그 뜨거운 눈물.  전쟁터에서 다시는 못 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학도병이 마시고 싶어 했던 그 찬 옹담샘 맑은 물......... 비록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모두는 다 근본이 같은 원소기호 H2O의 물이다.

우리는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끝까지 생존해 보려는 민초의 강인함과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백성을 품으려는 따스한 충정이 있다면 그 아무리 풍전등화 속에서도 나라를 구할 수 있었음을 우리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무수히 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정치권에서는 주화파가 옳으냐 척화파가 옳으냐며 진영논리에 빠져있다는 일전의 한국 기사를 읽으면서, 나의 안위와 영광만을 쫓는 비루한 삶이 아닌 백성을 위해 눈물을 흘려줄 위정자가 과연 몇 명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곰곰이 물어보게 만들었다.

나의 백성들인 가족, 친구, 동료, 이웃......
저물어 가는 이 한해를 돌이켜 볼 때,  "이것이 백성이냐"라고 한탄했지만, 그래도 "이것이 백성일 수 있겠구나"며 그들을 품는 눈물이 나에게나 우리에게도 과연 있었던가?

그 따스한 한 방울의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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