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웨이 12주를 끝내고
난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소유한 학벌, 내가 거친 직업, 내가 살아온 과정이 내 존재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나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과 만나야 할 때, 그들에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지 못하면 부끄러웠다. 그들이 나를 인정하고, 두려워서 함부로 대하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무엇이었나. 배우고 싶은 게 많고, 앎에 대한 열망이 컸다. 바쁘게 살고, 많은 걸 배웠지만 배우면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시간을 들인 결과물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나를 증명하는 도구가 되지 못하자 마음이 허전했다. 난 철저히 자본주의형 인간이었다. 배움과 독서만으로 단단해지는 인간이 되기에 내 자아는 참 약하다.
아이였을 때,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불편한 마음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 나는 순종하는 삶을 선택했다. 여자아이여서, 막내여서,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자식이어서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동적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고, 무시당해도 내가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억울한 이유는 모두 나한테 있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나는 남들에게 거스르지 않기 위해 행동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행위는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는 거라고 한다. 아이인 내게 어른들은 내가 소중한 아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널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잘못하는 거야, 네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날 토닥여준 유일한 어른은 내게 그런 사고의 틀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기 삶을 살아내기도 고단했고, 어린 내가 보다 나은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줄 여력이 없었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고,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내 마음에 무뎠다. 냉소적이고 ‘그럴 수도 있지’라며 만사를 무던하게 받아들였다. 담담한 무던함이 아니라 별 기대가 없는 포기였다. 펌프질로 물을 길어 오르기 위해서는 마중물을 부어야 한다. 물을 한 바가지 넣어야 내 안에 고인 물이 퍼올려진다. 딱 한 바가지. 펌프질은 내가 해야 한다.
내 상처를 드러내는 말과 내 말에 경청하는 이들, 매일의 글쓰기는 바닥에 고인 나라는 자아를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었다. 흙탕물을 뿜어내야 맑은 물이 올라온다. 내가 만난 자아가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모습이어서 겸연쩍다. 이 마음 또한 사회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던 학습의 결과이리라.
나는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존재함만으로 사랑받지 못해서 아팠던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을 받고자 원했던 대상은 모두가 아픈 이들이었다. 그들도 아픈 사람이구나 이해가 간다. 나를 다독이며 “그때 미안했어”라고 말해줘야 할 사람에게 사과를 받지 못해도 이제 괜찮다. 사람을 미워하는 건 힘들다. 나를 사랑하고, 주변 사람에게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게 나를 지키는 길이다. 정을 나누는 건 어렵지 않은데, 나를 사랑하는 건 쉽지 않다. 창조성을 찾기 위한 참가한 어느 프로그램에서 나를 들여다본 내가 어떤 존재가 될지, 미소를 띄고 나를 바라본다.
2022년 7월 21일 목요일부터 10월 13일 목요일까지,
저녁 6시에 모여 9시까지 12번의 워크숍을 진행했다.
울고 웃고, 경청하며 너와 나의 상처와 풀리지 않은 매듭들을 공유했다.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모임을 끝낸 단상을 적어 작은 기념 책자를 만들기로 했다.
책자에 싣기 위해 쓴 글과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