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늠 Jan 16. 2023

질투

내 질투의 장르는 누보로망

“학교에 와서 교실문을 열려고 하니까 안열려졌다. 남자들이 여자는 못들어오게 하고 남자만 들어오게 한다. 그런데 ○○가 열어주어서 들어갔다. 회장과 부회장 남, 녀를 뽑았다. 그런데 회장은 ○○○, 부회장은 남자 ○○○, 여자는 A다. 점심시간에 보니까 A, B, C, D 이런 여수끼리만 모여 앉아서 먹으면서 웃는것도 여수, 먹는것도 여수, 모든 것이 여수이었다.

그중에서 C, A, B만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1984년 3월 14일 수요일의 일기다. 초등학생 때 일기 숙제를 내고 검사를 받았다. 일기에 쓴 A, B, C, D는 공부와 노래를 잘하고, 예쁜 원피스를 입고 다니던 아이들이었다. 지금도 두 명의 아이가 기억난다. 그들은 선생님에게 주목받고 칭찬받는 대상이었다.      


다음 날 일기를 보니 선생님이 내가 일기에 언급했던 네 명의 여자아이들이 함께 점심을 못 먹게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내 일기를 읽었을 선생님이 취한 조치였을 것이다. 밥을 같이 못 먹게 한다고 해서 친구였던 사이가 갈라지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난 그들 중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했다.  

    

샘이 많았던 만큼 욕심도 컸다면 난 지금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을 탐내는 마음보다 내가 닿을 수 있는 나무가 아니라는 마음을 갖는 편을 택해서인지 난 연예인도, 사람도 열렬히 사랑해 본 적이 없다. 내가 보이는 호의와 비슷한 정도의 선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더 다가갔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경계했으며, 내 마음보다 과한 애정을 주는 사람에게 선을 그었다.      


10살의 나는 샘나는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친해지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그런데 언제부터 사람에 대한 마음을 쉽게 접게 되었을까.

고등학생 때, 단짝이 될 뻔했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에게는 늘 붙어 다니던 친구가 이미 있었다. 그 아이의 기존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난 말이 잘 통하고, 친해지고 싶었던 아이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나를 경멸하듯 쳐다보던 그 아이의 기존 친구를 보며, 내가 느꼈던 마음은 분노가 아니었다. 어이가 없고 불쌍했다. 그 아이 곁을 맴돌며 종종거리는 기존 친구가 안쓰러웠다. 난 괜찮으니 네가 가지라고 그 두 사람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질투’를 제목으로 한 영화, 책, 드라마가 있다.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단어 중에 질투를 제목의 일부로 사용하여 예술의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많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책 『질투』는 자의식을 제거하고 질투하는 화자의 시선에 보이는 풍경을 묘사한다.



필립 가렐의 영화 <질투>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면 흔할 보편적인 감정과 사건이 흑백의 영상으로 표현된다.


출처: https://movie.daum.net


최수종과 최진실이 주연으로 나왔던 드라마 <<질투>>는 “더 이상 질투하기 싫어”란 말로 사랑을 확인하는 두 주인공을 빙글빙글 돌며 보여주었다.      


출처: MBC 1992.06.01~1992.07.21 방영



내 삶에 있었던 질투는 알랭 로브그리예의 책을 닮았다. 두 연인이 클로즈업될 만한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보다는 소유하고 싶은 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이름도 없는 소설 속 화자 말이다. 화자의 감정 없는 시선으로만 전개되는 소설을 쓴 저자는 누보로망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선두 주자로 꼽힌다. 누보로망은 무엇을 쓰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쓰는가에 집중하는 장르다. 내가 주인공으로 살지 못해서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에 사로잡힌 경험은 별로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따위의 거창한 대의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여느 소시민처럼 소소한 일탈을 남모르게 저질렀지만, 큰 맥락에서는 무난한 삶을 살고 있다.     

 



질투하는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던 10살의 풍경을 누보로망식으로 써보며, 귀여웠던 나를 생각하며 웃는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A는 기다리지 않고 B의 책상 쪽으로 갔다. C는 B의 짝꿍이었고, D도 뒤돌아 앉았다. 옅은 미색의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A가 책상 사이의 복도를 걷는다. A는 웃는다. A가 걷는 복도는 두 개의 분단이 평행으로 나뉘어 있다. 마루 바닥의 곧은 선을 따라 책상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곧은 직선의 가운데 동그란 곤로가 놓여있다. 두 개의 책상을 지나 B와 C의 책상 앞에 앉는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일어서 자리를 옮긴다. A와 D가 도시락 가방을 열며 이야기한다. 대화의 소재는 아침에 늦잠 잔 이야기, 머리를 땋지 못해 하나로 묶은 이야기, 합창단 연습 등등이다. A와 D가 반찬 뚜껑을 열자 소시지, 계란 반찬이 보인다.


그들은 여우같이 웃으며 밥을 먹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사랑하는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